03 | 문득 그리운 날에는
토요일 아침 일찍 한인 마트에 갔다. 자주 가기는 어려워 한번 갈 때마다 일반 마트에는 없는 떡, 어묵, 소면, 콩나물, 한국 채소 등을 여러 개씩 잔뜩 담아온다. 그러고 나면 장바구니를 등에도 매고 양 어깨에도 척척 메고는 보따리장수처럼 마트를 나서게 된다. 어깨는 무겁지만 발걸음은 신난다. 햇볕이 좋아 다리를 건너 다음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다리 위에서 보는 센 강도 에펠탑도 그 앞을 지나가는 지하철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가 언제 오는지 확인하려고 하니 전광판이 고장 나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보니 십사 분 후에 도착 예정이었다.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고 벤치에 앉았다. 한숨 돌리고 있는데 옆에 앉아 계시던 중국인 할머니께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셨다. 갑작스러운 프랑스어 질문에 당황했지만 더듬더듬 답했다.
- 프랑스어로 말하기 힘들지?
- 네, 정말 힘드네요.
- 어디서 왔니?
- 한국에서 왔어요.
- 나는 95년도에 중국에서 왔어.
- 와, 진짜 오래 계셨네요. 가끔 중국이 그립지요?
- 그럼. 그립지.
그립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빛과 목소리에 그간의 세월이 묻어있었다. 할머니 옆에서 나의 그리움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뒤섞인 십여 분의 시간 동안 서로에게 애잔함이 스며들었다. 타지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많은 감정은 굳이 꺼내 이야기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프랑스에서 보내는 첫해에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 지인들과 통화하고 나면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래서 선뜻 그립다는 감정을 표현하기를 꺼렸다. 그런 나와 달리 아이는 전화를 끊고 나면 한동안 침묵하며 덤덤히 시간을 보냈다. 엄마 아빠 때문에 일찍 그리움을 알아버린 아이는 자기 방식대로 낯선 그 빈 감정을 잘 살펴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누군가 보고 싶은 날에는 사진을 보거나 문득 생각난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보고 싶다고 숨김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이와 추억여행을 같이 하다 보면 나는 또 울컥하는데 아이는 더 밝게 웃으며 마음을 채워갔다.
코로나로 한동안 문을 닫았던 도서관이 다시 열었다. 이사 올 때 반납하지 못했던 책들을 가지고 전에 살던 동네에 왔다. 익숙한 공간들이 주는 안도감이 좋았다. 오랜만에 우리만의 아지트에 들러 예전처럼 놀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단골 빵집에서 빵을 사서 가기로 했다. 집마다 김치 맛이 다르듯 프랑스는 빵집마다 빵 맛이 달랐다. 예전에 살던 집 앞 빵집 맛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사하고 생각지도 못하게 빵이 입에 맞지 않아 한동안 고생했었다.
빵집으로 가는 익숙한 골목길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지나가던 우리를 먼저 알아보고 잘 지냈냐며 안부를 물었다. 아주머니는 윤이가 그새 많이 컸다며 신기해하고 우리는 빵이 입에 안 맞아서 고생한 이야기를 전하며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반가우면서도 마음이 찡했다.
길에서 우리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있고, 항상 안부를 물어봐 주는 사람들이 있고, 마트에 가면 계산대 아래에서 간식을 꺼내 윤이에게 나눠 주시기도 하고, 이사 소식에 같이 아쉬워해 주던 사람들이 있는 이곳이 항상 그리웠다. 낯선 곳에서 별 탈 없이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건 이 동네 사람들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들러 인사를 나누고 나니 그동안의 아쉽고 그리웠던 마음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좋은 기운을 듬뿍 채워 집으로 돌아왔다.
이사하는 날, 건물에서 마주친 새로운 이웃들이 Bienvenue (비앙브뉴, 환영해)라며 반겨줬다. 환영한다는 말은 공항 벽에 적혀있는 형식적인 단어 같았는데 실제로 들으니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왠지 이곳을 떠나게 되는 날도 몹시 아쉽고 그리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움이 많다는 건 한편으로는 그만큼 추억이 많이 있다는 거니 꼭 허전하고 텅 빈 감정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리움의 감정만큼 현재를 더 소중하게 채워가는 법도 알아가고 있다.
#엄마나랑친구할래 #정민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