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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민 Jan 28. 2022

언어 하나만큼의 거리

04 | 두 언어 사이에서

햇살 좋은 오후, 빌라 단지 마당에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었다.


  -  나도 같이 가서 놀고 싶다.

  -  그래, 나가서 놀고 와.

  -  그런데 엄마나 아빠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이사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색했던 아이는 마당에서 놀고 있는 형, 누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아빠는 곧 온라인 미팅이 잡혀 있었고 시간이 되는 사람은 엄마, 나뿐이었다. 문제는 나의 프랑스어 실력이 겨우 자기소개를 할 수 있을 정도라는 점이었다. 주저하는 나에게 아이가 말했다.


  - 내가 프랑스어 할 줄 알아.


  천진하게 툭 이야기한 그 순간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아이 말에 애써 담담한 척 같이 마당에 나갔다. 마당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엄마 생각이 났다. 휴대전화의 기능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엄마는 오빠와 나를 호출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점점 나도 모르게 툴툴대곤 했다.


  -  이렇게 이렇게만 하면 돼요.


  부모님에게 휴대전화는 편리하면서도 잘못 만지면 큰일 날 것만 같은 물건처럼 보였다. 오빠도 나도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우리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시며 사소한 불편들을 참으셨다. 참다 참다 나중에는 휴대전화를 구입한 대리점에 찾아가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시곤 했다.


  몇 해 전 부모님 집 에어컨이 고장 났었다. 수리 기사님과 전화를 하기로 했는데 그 시간에 맞춰 내가 집에 있어 줬으면 하셨다. 가전제품 뒷면에는 왜 이렇게 영어로 많이 적혀 있는지. 사실 나 역시 사용하던 가전제품이 고장 나 서비스센터에 전화할 때마다 어디에 있는 번호를 말해줘야 하는지 헤매곤 한다. 나도 그런데 엄마는 얼마나 그 일이 어렵게 느껴지셨을까. 그리고 나한테 부탁할 때마다 지금 벤치에 앉아 있는 내 마음 같았을까? 엄마는 얼마나 용기 내 그 많은 부끄러움을 삼켜야 했을까. 그 마음을 이제야 헤아려보고 있다.


  프랑스에 오며 제일 많이 한 걱정은 윤이와 나의 프랑스어였다. 나는 교재와 인터넷 강의가 있으니 공부하면 되지만 아이는 어떻게 프랑스어를 알려줄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서 그 고민의 화살은 나에게로 향했다. 아이는 아주 빠르게 프랑스어를 익혔고 나는 제자리에서만 맴돌았다. 


  처음에는 아이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 게 신기하고 기특했다. 하지만 점점 아이가 나에게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면 마음이 벌렁벌렁 굳어갔다. 특히 아이가 신나서 프랑스어로 이야기할 때면 나는 어쩔 줄 몰라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아이가 하는 말들을 마음으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움이라니. 아이와 나 사이에 생긴 생각지 못했던 장면을 마주하며 아이와 언어 하나만큼의 거리를 느낀다. 아마도 아이가 커가면서 이렇게 하나씩 점점 거리가 늘어나겠지.



#엄마나랑친구할래 #정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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