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옆집에는 이란인 가족이 산다. 다른 한쪽은 창고 건물이고 뒷집은 뒷마당끼리 맞닿아 있어 잘 보이지도 않으니까 이 사람들이 내게는 유일한 이웃인 셈이다. 그리고 그 집의 2층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가족이 하나 있지만 그저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발단은 주차였다. 차 두 대를 세울 공간이 있는 옆집 주차장은 아저씨가 택시업을 하고 있는 데다 다 큰 아이들이 둘이나 있으니 늘 자리가 부족했다. 아직까지도 정확히 몇 대가 있는지 어느 차가 그 집 소유인지 파악을 못 하고 있는 나로서는 내 주차장을 막고 있던 차가 그 집 아들 짓이라는 걸 시에 신고를 하고 나서야 알았다. 시에서는 긴급상황도 아닌데 전화한다고 몇 분 안에 나올 리도 없었다. 짜증이 잔뜩 난 채로 기다리는 동안 옆집에서 그가 나왔다. 신고는 물론 바로 철회했다. 그는 적반하장으로 펄펄 뛰었다.
"옆집 차도 몰라봐요? 와서 치워달라고만 하면 되는데."
얼마 뒤, 또 막고 있어서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이번엔 간신히 내 차를 뺄 수 있을 만큼만 막은 상태였다. 그는 충분히 나갈 수 있는데 뭐가 문제냐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마침 그의 엄마가 나오길래 설명을 했다. 녀석은 차를 옮겨놓고 들어가며 내뱉었다.
"Crazy woman"
그의 엄마는 놀라서 아들을 노려보고 내게 사과했다.
몬트리올의 봄은 신기하다. 겨우내 보기 힘들던 이웃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런 계절이다. 한편으로는 모처럼 햇빛을 즐기면서 해먹을 펴고 누웠다가 옆집에서 올라오는 마리화나 냄새에 기분을 잡치는 그런 시기기도 했다. 이웃이란 참 이상한 관계였다. 전에는 몰랐던, 아파트에 살 때와는 많이 다른 관계가 단독주택에 살면서는 생겼다. 나는 그 집에서 넘어오는 포도덩굴을 잘라내느라 매년 고생했고, 그쪽에서는 우리 집 나무가 낙엽을 많이 떨군다고 불평했다. 평소에는 온화한 옆집 아저씨는 어쩌다 한 번씩 페르시아어로 큰 소리를 냈다. 그것은 내가 아이들에게 한국말로 화를 내는 소리도 그쪽으로 넘어갔으리라는 말이다. 그 집의 까망이 포메라니안과 우리 토이푸들은, 이 귀엽고 하찮은 쪼꼬미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철조망으로 세운 담을 사이에 두고 맹렬하게 짖어서 성가셨다.
옆집 부부와는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늘 조심스러웠다. 그 긴장감을 과감하게 끊어서 큰 소리를 내게 만든 게 그 집 아들이었다. 이제는 마리화나가 합법이 돼버린 캐나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오는 냄새는 불평한들 소용이 없었다. 견디다 못해 아저씨께 아들내미 마리화나 연기 좀 어떻게 안 되겠냐 물었더니 '누구나 대마는 피지 않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건, 언젠가 내게 전한 그의 위로 한 마디 때문이다. 바람난 전남편을 내보내고 얼마 후,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왔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틀림없이 돌아올 거니까 걱정 말아요. 당신보다 좋은 여자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요. 당신은 내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에요."
이란 할아버지의 구시대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고마웠다. 아이들을 데리고 공항에 갈 일이 생기면 그의 택시로 태워다 주었다. 그런데 한국에 다녀오던 날, 픽업을 부탁하러 공항에서 전화를 했더니 병원에 있어서 못 온다고 했다. 이틀 후, 이웃집의 초인종을 누르자 아들이 나왔다.
"지금 통화하느라 바쁜데 무슨 일이에요?"
그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사 온 예쁜 풍경 하나를 선물로 건네면서 아버지가 어떠신지를 물었다.
"좋아지셨어요"
그는 고맙다며 문을 닫았다. 그날 병원에 간 결과를 듣게 된 건 2-3주 후의 일이었다. 암이었다. 이미 퍼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뒤로 그는 내가 미처 못 봐도 먼저 온화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내 마음도 누그러졌다.
아저씨는 어느 날은 평소처럼 강아지 산책을 시키며 인사를 건네고, 어떤 날에는 앞마당에서 잡초를 뽑는 나를 슬그머니 못 본 척 뒤편으로 돌아서 집으로 들어갔다. 한 번은 아들이 어머니에게 거칠게 반항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색한 긴장감이 돌았다. 아주머니는 남편이 일을 못하게 되면 집을 팔고 동생이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동안 불만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이웃을 잃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옆집 아들은 내가 실직한 걸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평일 낮에는 여전히 우리 집 앞에 차를 대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한 번은 뒷마당에 앉아있는데 심한 기침 소리가 들리고 곧 마리화나 냄새가 났다. 그렇게 몇 번 겪고 나서 알게 됐다. 피우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니 자주 냄새가 올라오는 게 당연했다. 암으로 진통제 대신 피는 마리화나라면 눈감아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지만 방광암인데 웬 기침? 고개를 들어보니 2층 발코니에서 내려오는 냄새였다. 평소 담배를 주로 피우던 옆집 세입자 할아버지가 이제는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레게 머리에 선글라스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경쾌한 걸음으로 산책을 다니던 분이었는데 올해는 밖에서 본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서 나는 슬며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인생의 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