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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Apr 05. 2024

 <에필로그>부모와 아이, 그 존재의 미학적 거리

아이들이 커가면서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예전엔 가족이라면 모두 함께 여행을 가고, 함께 식사를 하는 등 뭐든 함께 해야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각자 흩어지는 모습이 불편했다. 아이들에게 훈계도 잔소리도 많아졌다.     


아이들은 행동반경이 넓어지면서 우리의 통제권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점점 함께 하는 시간은 줄었고 안했으면 행동은 늘었다. 교사 부모의 고질병인 모범적인 태도를 강요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았고 이러다가는 관계조차 뒤틀릴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했다.    


어느 순간 더이상 지나치게 종용하지 않게 되었다. 나도 그 나이 때쯤 부모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젊은 날의 나도 내 즐거움이, 내 생활이 중요했지 부모의 바람대로만 하진 않았으니까. 그걸 깨달은 후로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았다고는 해도 내면으로는 솔직히 불편함이 가시지는 않았다.  


보름달이 환했던 어느 날 밤, 산책을 나갔다.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은 어두운 산책길을 비춰주며 그야말로 꿈속의 길 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산책길 옆의 개천에는 노랗다 못해 하얗게 보이는 또 다른 보름달이 떠 있었다. 바로 옆 가로등의 불빛도 개천의 물과 함께 흘러 어느 인상주의 화가의 풍경화처럼 멋지게 보였다.    




하늘을 향해 휴대폰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셔터를 누르고 찍은 사진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아까는 전혀 몰랐던 별이 보름달 옆에 나란히 있었다.

‘분명 아까는 보이지 않았는데?’

너무 밝은 보름달에 주변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별 옆에는 또 다른 별이 있었다.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보름달과 별, 그리고 가로등 불빛은 그렇게 각자의 존재로 빛을 뿜어내었다.     


서로의 존재를 지킬 수 있는 거리, 바로 그게 건강한 거리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보름달 아주 가까운 곳에 별이 있었다면 보였을까? 보름달에 너무 가깝게 있었다면 그 빛에 삼켜져 전혀 존재를 몰랐겠지. 서로를 삼키거나 뭉쳐져 하나의 빛처럼 보였을 거다.     


학교 미술 시간에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실망하는 반 아이들에게 평소 해 주는 말이 있다.

"그리는 너는 불완전한 과정을 보고 가까이 보기 때문에 실망할 수도 있어. 하지만 끝까지 완성하고 조금 떨어져서 감상하면 또 다른 느낌이 올 거야. “

이처럼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이상적인 거리가 필요하다. 실제로 그렇게 아쉬워하던 아이들이 끝까지 작품을 끝내고 칠판에 붙인 후 조금 떨어져서 감상하더니 생각보다 멋진 작품에 감탄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사람 사이에도 제대로 볼 수 있는 건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보름달과 너무 가깝지 않아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는 별처럼 존재 사이에도 미학적 거리가 필요하다. 그렇게 타인이 자신을 잃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해 주는 것도 배려이다. 배려의 거리, 존중의 거리이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가고 만들어 가기 위해 변하는 모습에 대해 나는 내 빛 안에서만 가두려고 하지 않았나 싶다. 그 안에서 아이들이 빛을 잃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곁에 두었다는 걸로 위안을 삼았는지 모르겠다.     


가족이라고 해서 항상 함께 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나의 욕심일 것이다.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너무 스스로에게도 강요한 건 아닐까. 각자의 생활을 존중하면서 함께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변해가는 아이들을 대하는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가정의 모습을 동경하며 우리만의 건강한 거리를 알아가는 걸 외면했던 건 아니었나 싶다.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만의 특성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걸 무시하고 틀에 맞추려다 보면 서로 상처 주는 관계가 되고 말 것이다. 너무 가까워도 그 가까움이 도리어 독이 되어 더 큰 상처를 준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더욱 견고해졌다. 아쉬울 정도로 함께 하는 시간이 줄었다. 그래도 변화를 존중한다. 대신 틈새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나름 노력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이들을 보기가 편안해졌다. 남들 보기에 이상적으로 보이지 않아도 돼. 우리 가족에게 맞는 건강한 거리가 있는 거야. 너와 내가 건강한 존재로 지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존재 사이에는 미학적 거리가 필요한 거야.     


적당한 거리를 위한 우리 가족의 노력은 진행 중이다. 내 아이라고 소유하지도, 방임하지도 않을 적정한 거리는 각자 자신들만이 아는 것이다. 그조차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치열하게 성찰하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아쉬움도 남지만 그것도 감당하는 게 부모의 몫인 것 같다.     


아름다운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모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모두 적용된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가장 밀접한 거리인 부모 자식 간, 연인간, 부부간의 거리에도 최소한의 심리적 거리는 두어야 한다고 했단다. 어떤 가까운 사이여도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잊지 않을, 최소한의 거리를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관계를 오래도록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존재에 대해 내 곁을 너무 가까이 내어 주었다면 스스로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존재와 내가 공존하는 관계인가,

내 존재가 흡수된 관계인가,

내가 흡수하는 관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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