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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Jul 02. 2022

우아한 미친년, 집을 나가기로 결심하다.

혼자여야 내가 될 수 있기에

우아한 미친년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2018, 문학동네)은 이진순이 2013년부터 6년간 한계례신문에 연재한 인터뷰 중 열두 편을 엮은 것이다. 나의 시선은 책에 실린 화가 윤석남의 ‘핑크룸’에 오래 머물렀다. 1995년도 작품이라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나를 박제해 놓은 것 같았다.         



윤기 흐르는 핑크 공단으로 감싼 화려한 서양 소파, 보석 같은 자개가 박힌 옷을 입고 소파에 붙박인 무기력한 여성. 화려하고 허망한 삶의 진공상태를 표현한 <핑크룸>은 화가 윤석남 본인의 솔직한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사진 출처: 경기도미술관 홈페이지)


퇴사 후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현금 흐름을 갖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시도했다. 남편은 가정에서 남편이자 아빠가 되기 위해 워라밸(work life balance)이 보장되는 직장으로 이직했다. 작은 실패 몇 차례와 작은 성공 몇 차례를 거쳐 나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는, 때로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수입이 꾸준히 생겼다. 남편은 이직과 승진을 거쳐 두 아이를 길러내고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한 수입을 벌어 들였다.

      

퇴사하기 전, 우리는 한 집에 살아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남편이 퇴근한 새벽 3시, 나는 아이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내가 출근하는 7시, 남편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새로 생기는 금융자격증 시험을 치르기 위해, 기존에 보유한 자격에 대한 유지 보수 연수를 위해 어떨 땐 주말에도 일해야 했다. 남편은 때때로 주말에 출근했고 며칠간 출장을 가기도 했다. 토요일 또는 일요일 양가 부모님 댁에 방문하고 나면, 오롯이 우리 가족만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 시간을 긁어모아 아빠, 엄마로서 아이와 추억을 만들다 보면, 남편과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되었을까. 


지금 우리는 고전적인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대한민국 4인 가족의 표준 같은 일상을 보낸다. 저녁 식사 후 아이들과 산책을 하거나 숙제를 도와주고 함께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는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잘 다녀와.", "잘 있어." 서로 인사하고 헤어진다. 


이만하면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여전히 외로웠고 때때로 고독했다. 문득 드는 '난 왜 살고 있지?'라는 의문에 까닭 없이 괴로웠다. 화가 윤석남에 대해 평론을 쓴 도쿄 경제대 서경식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우아한 미친년'같은 생각들이었다.     


'등 따숩고 배부르니 호강에 받쳐서 저런다라는 경멸에 찬 시선에도 딱히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해 외로워하는'

'이기적이고 몽상적인 일로 치부되는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체제의 안전선 밖으로 언제 튀어나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여자들을 미친년 취급하던 시절'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서경식 교수가 윤석남을 그리며 말한 그 시절은 이젠 지나갔을까. 끊임없이 핑크 소파를 박차고 나가려는 나는 무엇이 문제인 걸까.      






나 정말 혼자 살고 싶어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라고. 아이의 문제가 나의 문제는 아니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남편과 아이에게서 나를 분리하려고 했고, 분리된 나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세워지지가 않았다. 파도가 쓸고 가버린 모래성처럼 한 순간에 무너졌다. 무엇이 되어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노력은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확인하는 데에서 끝나버렸다. 

  

오직 열등감만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기에 내가 될 수 있는 건 괴물뿐이었다. 어느 날, 아이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나는 나를 지키지 못하고 완전히 지고 말았다. 소설 <지킬 앤 하이드>에서 결국 지킬박사가 하이드를 이기지 못하고 스러졌듯이, 괴물이 된 나에게 철저히 지고 만 나는 안락하고 잔인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남편에게 “나 정말 혼자 살고 싶어.”라는 한없이 이기적이고 끝없이 몽상적인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나는 이거밖에 안 되는 내가 부끄러워 입을 열기 이전부터 눈물을 흘렸고, 말을 꺼내놓고도 두려워서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삼켰다.


“그래, 그러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고개를 들어 남편의 얼굴을 보았는데 하나님이 보낸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그래그래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하자 하자." 그의 말이 공명처럼 온 방 안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사라져 버릴까 무서워 나는 부은 눈을 힘주어 분명하게 뜨고 "고마워!"라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내 탈출에 너도 동의한 거야. 이제 다시 되돌릴 순 없어.’ 


나는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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