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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Feb 17. 2024

명절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 부담스러운 요구 거절하기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고모들과 작은 어머니 전화다. 명절이 다가오니 전화를 하신 거다. 4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를 모시고 오고부터 친척들과 엄마, 아빠친구, 지인 분들의 전화를 받는다.


자식이 나 혼자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다들 부모님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으로 하시는 전화라 생각해 좋은 마음으로 받았다. 엄마 친구분 중에는 정말 며칠에 한 번씩 전화하셔서 엄마의 생활상이나 치매 진행 상태를 계속 묻는 분도 계셨다.


아빠 친구의 부인 분까지 전화하셔서 엄마, 아빠가 그래도 사회생활 잘하셨구나 생각하며 좀 힘들었지만 친절하게 엄마의 상태를 설명해 드리고 그분의 근황까지 묻곤 했다. 대화할 상대가 없으신지 대부분의 어른들이 말씀을 많이 하신다. 예전 이야기부터 최근 근황까지 끊지도 못하고 쩔쩔매며 긴 시간 전화 들어드리기를 4년 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일이 너무 힘들어졌다.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전화가 짜증스러워졌다. 그 분들은 그 한 번의 전화로 엄마에 대한 의무를 다 한다는 생각이겠지만 매번 같은 이야기를 그것도 엄마의 안 좋은 상태를 구구절절 똑같이 설명해야 하는 자식의 마음은 고통스럽다.


“엄마가 왜 못 걷게 된 거니?” “혼자 식사를 못 하시니? 왜 죽을 드시니? 이가  좋니”같은 시시콜콜한 질문들과 결국 마지막에는 “엄마가 왜 저렇게 됐을까?”로  끝나는 답도 없고 기운  빠지는 대화를 굉장히 자주 하게 된다.


고모들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사진이라도 보내라고 하신다. 고모 세분께 요양원에 계신 엄마의 사진을 전송해 드렸다. 그 사진을 보고 고모들은 “ 너무 안 돼서 울었다. 마음이 아프다. 깜짝 놀랐다. 너무 심하다. 왜 저렇게 됐냐”는 내 가슴을 후벼 파는 질문과 한탄을 했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한 번 찾아보지도 않아 놓고 그런 말을 듣는 조카의 심정은 어떨지 헤아리지 못하는 거 같다. 나도 계속 나빠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게 힘들고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애써 마음을 다스려 가라앉힌 마음의 소용돌이를 기어이 일으킨다.


엄마를 모시고 살던 때 단 한 번도 찾아오거나 엄마 돌보느냐고 애쓴다고 값싼 주스 한 상자 한 번 보내지 않고는 그저 전화, 전화, 전화로 엄마의 상태를 묻고 “왜 저렇게 됐니?”라는 답 없는 똑같은 대화들뿐이다. 


반면 작은 어머니는 치매엄마 돌보는 게 얼마나 힘드냐며 몇 차례 당신 집에 모시고 가셨다. 화단도 예쁘게 가꾸시는 전원주택이라 엄마에게도 무척 좋았다. 그렇게 하루라도 모시고 가시니 내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모시고 가셨지만 그 댁 침대에서 떨어져 고관절 골절이 되고 수술 후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시면서 요양병원에서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퇴원시기와 집 이사가 겹쳤고 스스로 배변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회복되면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다시 모실 자신은 없었지만 다 나으시고 건강한데 요양원에 모실 자신도 없었다.


그 당시 엄마를 2년간 모시면서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엄마에게 복잡한 감정이 많은 데다 강한 성격은 그대로 간직한 채 치매까지 앓고 계신 엄마와의 생활은 많이 힘들었다. 내 가족의 평범한 일상도 사라져 버렸고 나는 늘 긴장 상태와 스트레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기복을 겪었다


아이들 앞에서 엄마에게 소리 지르고 화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고 나면 죄책감과 아이들 앞에서 못 보일 꼴을 보였다는 자책감으로 이중 삼중으로 힘들었다. 나중에는 엄마와 나의 갈등 때문에 단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아이들까지 심하게 싸우는 일이 생겼다. 이대로는 우리 가정까지 무너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렇게 지옥 같은 간병이 이어지던 차에 작은어머니가 엄마를 모시고 갔고 그런 사고가 일어나 자연스럽게 요양원으로 모시게 됐다.


그런 과정을 겪었어도 매번 보는 엄마의 모습은 나를 무너뜨린다. 나날이 쇠약해지고 마른 와상환자가 되어 버린 엄마의 모습은 그 자체로 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다.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렇게 명절이 되어 친척들의 전화가 오고 이런저런 일들이 나를 다시 심하게 휘저어놓는다. 그러면 나는 또 똑같은 생각의 굴레에 빠져들어 ‘정말 어쩔 수 없었을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엄마가 저 지경은 되지 않았을까?’라는 스스로를 좀 먹는 생각에 빠져든다.


말 뿐인 고상하고 착한 고모들 틈에서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 이제야 깨달아진다. 온갖 궂은일은 엄마 혼자 다 하는데 몸만 와서 세상 우아하고 착한 표정으로 좋은 말만 할 수 있는 고모들에 대한 엄마의 증오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가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를 모시게 된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작은어머니와 막내 외삼촌뿐이었다. 막내 외삼촌은 호텔을 예약해 다른 외삼촌들과 엄마가 집이 아닌 밖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때때로 엄마만 모시고 나가 외식을 시켜주고 음식을 한가득 포장해서 가져다주었다.


다른 친척들은 오로지 전화뿐이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자주 전화해서 힘들었다. 나중에는 우리 부모님이 저리 되었으니 네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기적으로 친척 어른들께 인사전화를 돌리라고 했다.


이런 일을 겪다 보니 정말 좋은 사람, 진정한 공감을 해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어려운 일이 없을 때는 몰랐다. 온화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은 무조건 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엄마는 늘 거칠고 강한 표현을 써서 내가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엄마가 어릴 때 내게 했던 고모들에 대한 불평의 말이 뭔지 이해가 된다. 실제로 도움이 되고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은 힘이 들다 보니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한 사람은 고상하게 앉아 도덕군자인척 온갖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아직도 내 마음의 흙탕물이 소용돌이친다. 이 마음을 남편이나 자식이 공감해 주고 달래주길 원했다. 엄마도 그랬으리라. 난 어렸고 고상하게 앉아 엄마를 공감해주지 못했다. 거친 엄마 말로 생긴 내 상처만 바라봤다. 고모들의 끊임없는 전화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본인의 가족이 더 중요했던 아빠와 성격과 외모마저 고모와 쏙 빼닮은 나에게 느꼈을 엄마의 외로움과 고통이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된다.


대구에서 서울로 시집와서 친정도 멀고 친구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의 괴팍한 성격이 만들어지고 더 크게 발현된 이유를 알 수 있겠다. 억울한 사람은 친절해지기 힘들다.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마음의 병은 나날이 깊어졌을 것이다. 결국 이른 나이에 치매라는 병에 도달했다.


엄마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줬다면 내가 엄마를 이해하고 잘 지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엄마가 치매에 걸리고 이런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만 겨우 배울 수 있었던 걸까? 너무 늦게 깨닫게 된 미안함과 죄책감, 안쓰러움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날 휘저어 놓는다. 명절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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