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인사로 쓸 카톡 이모티콘을 구입하려는데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빈번하기에 몇 년 전부터 여러 앱의 비밀번호를 수첩에 적어둔다. 오랜만에 수첩을 들춰보니 내가 읽고 싶은 책제목을 적은 페이지가 보였다. 거기에는 ‘걷기’라는 키워드를 열고 찾아본 것 같은 책제목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다시 보니 그동안 읽었던 책도 있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도 있었다. 비밀번호 찾기는 까맣게 잊고 도서관 앱으로 들어가 아직 읽지 못한 걷기 관련 책을 찾아 보관함에 담고 서점앱에 들어가 도서관에 없는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 내가 걷기에 진심 이구나를 깨달았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매일 만보 이만보를 걷고 공유하는 분들에 비하면 그렇게 매일 걷지도 못하고 어떤 목표를 정하고 걷는건 아니지만 걷기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속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나도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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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 마녀체력의 <걷기의 말들 : 일상이 즐거워지는 마법의 주문>,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같은 에세이류뿐만 아니라 건강서적으로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 당뇨도 없지만 <걷기 운동으로 당뇨병 기적의 완치>이런 책들을 읽는다. 내가 좋아하는 걷기를 하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더 걷기가 좋아진다.
걷기가 좋다고 생각한 계기는 여행을 다니면서부터다. 가족들과 여행을 다닐 때 하루에 만 오천 보에서 이만 보 이상을 걷는데 피곤하기보다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아지는 경험을 했다. 내가 여행체질인가 생각했는데 많이 걷는 것이 좋은 거였다.
여행을 가면 맛집부터 길거리 음식등 꼭 경험해봐야 하는 음식들을 많이 먹게 된다. 평상시 같으면 그렇게 먹었다간 속이 안 좋아 한동안 고생했을 텐데 여행 가서는 오히려 소화가 잘 되었다. 난 어릴 때부터 속이 늘 좋지 않았다. 소화기관이 태생적으로 약하기도 한데 빨리 먹는 습관 때문인지 속이 좋을 때가 없었는데 여행 중에 그렇게 많은 음식을 먹어도 많이 걸어서인지 속이 편했다.
그 이후에 서울로 여행 왔다고 생각하고 이곳저곳 많이 걸어 다닌다. 혼자 익선동, 창경궁 갔던 일, 망원동 돌아다닌 일, 인사동에서 한 달 살기 하면서 많이 걸어 다닌 일들을 글로 썼었다. 거기에 공통점은 걷기였다. 내가 걷기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도 사람들과 약속이 없는 날에도 무조건 나가서 걷는다.
걷는 것이 왜 좋을까? 걷다 보면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은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도 신기하게 옅어진다. 우울하고 피곤해서 못 나갈 것 같다가도 생각을 끊고 일단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나서면 역시 잘 나왔다는 생각이 들고 기분이 바뀌는 경험을 많이 했다.
젊을 때는 존재 자체가 활기차고 가만히 있어도 대사가 원활하고 변화가 빨리빨리 이루어진다. 나이를 먹어가며 정체된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힘들다고 그냥 편안함만을 추구하고 가만히 있어보니 더 견디기 어려웠다. 아프고 힘이 없을수록 더 나와서 걸었다. 걷다 보니 에너지가 생기고 근력이 생겨서 좀 살만해졌다.
날씨가 추워도 그냥 나간다. 쨍하고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걷는 것도 생각보다 할 만했다. 유치원에서 일할때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면 본인의 아이는 바깥 놀이에 데리고 나가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학부모들이 있었는데 오히려 추운 날 바깥에서 활발하게 노는 게 더 건강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감기는 추운 공기 때문에 걸리는 것이 아니고 면역력이 떨어졌거나 사람이 많은 밀집된 곳에 있을때 더 잘 걸리기 때문에 오히려 바깥놀이를 충분히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의할 때 덴마크 유치원의 놀이중심 활동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북유럽의 추운 날씨에도 볼이 빨개지도록 눈 속에서 노는 모습의 아이들이 인상적이었다. 몇 시간을 놀아도 춥다고 들어가자는 아이들은 없었다. 추위를 잊고 신나게 노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미세먼지가 해롭지 낮은 온도는 걷기를 방해하는 요인은 아닌 것 같다. 모자를 쓰고 든든히 입고 용감하게 나가본다.
걷다 보면 행복해지는 호르몬이 나오는 것 같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좋은 일로 걷기를 추가해 본다. 책 읽기, 필사하기, 피아노 치기, 그림 그리기, 그리고 걷기.
걷기라는 활동 속에는 오래되고 예쁜 골목길 찾아다니기, 쇼핑몰 아이쇼핑하기, 자연 속 걷기 등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다.
빠르게 파워 있게 걸어야 운동이 된다는 말도 많이 하는데 난 그냥 내가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다. 구경할 게 있으면 슬렁슬렁 걷고 어딘가 목표지점을 향해 갈 때는 경보하듯이 빠르게 걷는다. 대단한 운동 효과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냥 소화가 잘 되고 행복한 느낌으로 기분이 변화되고 주변을 관찰하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만으로 걷기의 장점을 다 누린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못하고 좋아하지 않지만 걷기는 좋다. 약간의 언덕만 있어도 그런 곳은 걷기 싫어하고 평지만을 걷고 싶어 하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으로서 운전을 못하는 게 어떤 면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 어릴 때는 운전을 못하는 엄마라 불편하고 미안한 일도 많았지만 그 시기는 금방 지나갔다.
어디든 외출을 하려면 지하철 역을 오르내리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충분한 운동이 된다. 복잡한 시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닌다. 차와 한 몸인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분들은 주차가 되는지가 장소를 정하는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된다. 가뿐한 내 한 몸으로는 어디든 못 갈 곳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