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nest Aug 31. 2024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돌아보면 참으로 웃기는 삶이었다. 몇몇 특별한 기억이 있기는 하다. 갑자기 17년 전 하네다공항에서 울렸던 방송이 떠오른다. "honest사마, honest사마, 어쩌구저쩌구." 일본어라고는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저는 한국인이에요' 이 정도의 아주 기초적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나였기에 그 방송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합실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찾는 방송이라는 건 대충 눈치로 알 수 있었다. 특이한 건 그걸 탑승구 앞에서 마이크로 방송하는 게 아니라 건물 전체 방송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하고 탑승구 카운터로 갔더니 비행기 좌석을 바꿔 준다는 이야기였다. 고작 그 정도의 일로 하네다공항 전체에 방송을 해서 나를 찾는다고? 스물다섯 살의 나는 그런 작은 경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아이였다. '역시 난 뭔가 특별한 사람이구나. 누군가 세상에서 돌봐 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지.' 그렇게 해서 모두가 선호한다는 이코노미좌석의 제일 앞열(요즘은 웃돈을 받고 파는)의 창가쪽 좌리로 옮겼다. 지금도 난 그 이유를 모르겠다. 왜 굳이 방송까지 해 가며 나를 그 자리로 옮겨 줬는지.


상담을 받으면서 상담사선생님께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았기 때문에 학창시절엔 특별하지 않으려야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삶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모두 상단에 나가 졸업식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는 했었다.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첫 회사에 입사했더니 신입사원 연수 때 본부장이 점심을 먹으러 왔다며 나를 찾았다. 본부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인데 그런저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내심 나는 내가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세상은 성적순대로 살게 되지 않는다. 한 서른쯤까지는 그냥저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나름대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도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긴 일인데, 첫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이 회사를 계속 다니면 대표이사는 몰라도 본부장 정도는 되지 않을까. 어디에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승진이 누락된다고? 그런 일은 내 머릿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진을 하면 특진을 했지. 그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없었던 이유는 내 꿈도 있었지만 실은 이성문제도 있었다. 나는 같은 팀의 여자 대리를 몰래 만나고 있었는데 나는 신입사원이었던 반면에 그분은 대리 4년차로 과장 진급 연차였다. 비슷한 시기 내게 관심을 보인 서무 여직원도 있었는데, 결국  관계에 실패하고 만 대리 4년차 선배 여직원과의 만남을 택했던 건 아마도 내게 '뭔가 나는 이슈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무 여직원과의 만남은 흔히 있는 일고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반면 지금은 그래도 덜하지만 10년도 더 전에 신입사원이 과장 진급 연차의 대리 4년차 여직원과 만난다는 건 이슈가 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물론 대놓고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런 까닭에 지난 십수 년간 내 삶은 썩 아름답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고, 브런치에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운영했던 블로그에는 그런 글도 자주 썼던 것 같은데,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이성적인 나는 꽤나 목표지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 삶은 계획과 많이 달랐다. 심지어 무언가 황을 바꾸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현실과 이상이 다른 데에서 오는 인지부조화가 있는데 거기에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현실과 이상이 다른 건 당연한 셈인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뭐가 불만이었나 싶기도 하다. 결혼식이 행복했던 건, 천주교 영세를 받는 날 기쁘고 즐거웠던 건 다름아닌 오랜만에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식 사회를 예닐곱 번씩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내가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까닭이지 않는가 싶다.




현실에는 늘 만족하지 못하는데 이상은 높고 그러니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스트레스를 직접 아내에게 풀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보니 늘상 불만에 가득 찬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 노력하지는 않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도 적잖게 지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차라리 내가 뭐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아내가 힘들어도 보면서 이해는 할 수 있었을텐데. 결혼식을 올렸던 때는 MBA 재학 3학기였고, 8개월 정도 지나서 학위를 받았었다. 그 이후에는 법학과에 학사편입을 해서 2년을 더 다녔다. 실제로 뭔가 세상이 바뀌진 않았지만 뭔가 그렇게 하려는 모습의 남편을 보았던 그 시절이 그래도 아내와 내가 행복했던 시절이지 않나 싶다. 글을 쓰다가 갑자기 떠올랐는데 어쩌면 그래서 내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박사과정에 진학했으면 우리의 결혼생활도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 MBA 동기의 명언이 있었지. "왜 여기서 뭔가 일이 잘 되는 사람은 없을까요?" 하는 질문에 어떤 동기가 "야, 여기 다 남 덕 보려고 들어온 사람만 있고, 베풀려고 들어온 사람은 없는데 베푸는 사람이 있어야 덕 보는 사람도 있을 거 아냐"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나도 인생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MBA에 입학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에게 좋은 일을 만들어 줄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그래도 좋은 동문들이 많이 생겨서 좋다.


어쩌면 실은 나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MBA 진학이 내 인생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걸. 법학과에 학사편입을 하면서도 당연히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직장인을 위한 야간 법학전문대학원 같은 과정은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이권이 얽혀 있는데. 다만 그럼에도 혹시 생겼을 때 내가 그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꾸역꾸역 2년간 학교를 다녔지만 결과적으로 내 삶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물론 거짓말 같은 일이 생기긴 바랐었지만. 그래서 박사과정엔 진학할 수 없었다. 당장 학비만 해도 2천만 원 정도는 들 것이고, 생각보다 시간과 에너지 소비가 적지 않을텐데 그만큼의 효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MBA 전에 문학석사를 받을 때부터 시작해서, 난 2002년부터 2020년 2월까지 대학교 학적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잠깐은 쉬어도 되지 않나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그때 코로나19가 터졌다. 수백만 원을 내고 박사과정에 입학한 MBA 후배로부터 교수님 얼굴도 한 번 못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역시 쉬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혼을 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게 있다. 생각보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구나.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좀 어떠냐'는 것이다. 지난 40년을 늘 그런 강박 속에서 살았다. 뭔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데. 사는 대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뭔가를 이뤄 내고 싶었고 해내고 싶었다. 또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란 걸 해야 한다. 실은 노력은 하고 싶지 않았다. 법학과를 졸업하면서 깨달았다. 혹시 로스쿨에 진학할 수 있을까 싶어서 법학과를 힘들게 2년 다녔지만 학점은 엉망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수 학점만 만들려고 다녔던 것이니 그럴 수밖에.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왕 할 거면 학점이 엄청 좋게 잘하던가, 차라리 안 했어야 했는데. 난 애매하게 하긴 하면서도 학점은 또 엉망이고, 그냥 했다는 티만 내고 싶었던 것 아닌가. 뭔가 그렇게 핑계가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고작 그 핑계를 만들어 내려고 2년간 수업 다니랴, 시험 보랴 며칠씩 고생했다. 물론 대학생활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아주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저녁도 못 먹고 퇴근 후에 수업을 듣고 집으로 가면서는 '뭐하러 이렇게 사나' 하는 생각도 했었으니.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이 노력하지 않아도 많이 주어지면 좋은 것 아닌가. 그런 욕심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뭔가를 달성하기 위해 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실제로 내가 정말 그렇게 목표지향적인 사람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목표가 달성되면 좋고, 달성하기 위해 뭔가의 상황이 생기면 노력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 오랜 시간 체계적으로 애쓰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런데 또 그냥 그렇게 살면 어떤가. 이제야 비로소 그냥 좀 마음이라도 편히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좋은 회사에 다니고, 더 많은 월급을 받고, 더 좋은 집에 산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냥 지금도 못 지낼 정돈 아니지 않던가. 실은 솔직하게 말하면 난 월급도 적고, 회사도 마음에 안 들고, 사람들과 사이도 좋지 않지만, 몸이 편해서 지금 회사를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없지 않다. 나도 몰랐던 이 사실을 재작년이었던가. 내 친구는 캐치해 내더라. 어제처럼 때로는 밀린 일을 다 해결하고 나면 출근해서 하루 종일 책만 읽고, 인터넷 서핑만 하며 농땡이 치다 오는 날도 적지 않다. 심지어 일이 많은 날에도 난 내가 정해 놓은 딴짓 시간은 어느 정도 준수하는 편이다.(이조차 못 지킬 때는 진짜 일이 많은 때다.) 이 장점을 포기하고 뭔가를 위해 또 새롭게 도전해 볼 정도의 인물은 안 되지 않던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늘상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지, 사는 대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강박에 갇혀 살았다. 물론 그렇게 살면 좋겠지. 누가 모르나. 그리고 그렇게 살았던 세월이 있었으니까 지금 이나마 살고 있다는 생각도 솔직히 한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애쓰고 싶지 않은 게 내 솔직한 마음이라면, 정말 내가 사는 태도라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도 죄는 아니지 않는가. 내가 뭐 누군가와 꼭 열심히, 성실히 살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고. 어린 시절에는 좋은 머리로 태어난 건 세상으로부터 부여받은 재주이니 그걸 꼭 세상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그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죄책감은 좀 가져야 하려나. 그런데 그냥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사람으로만 안 살면, 그 정도로는 안 될까. 부여받은 재주에 비하면 너무 적게 돌려드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로 인해 세상이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좋게 말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다면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으려나.


이제는 그렇게 좀 스스로에게 너그럽고 여유롭게 살려고 한다.

신이시여, 허락하소서.


작가의 이전글 민원에 대처하는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