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곁에
있는 사람은 듣는데 나는들을 수 없
을 때、목자의 노래 소리를 남들은
듣는데 나는들을 수 없을 때、나는
절망에 빠져 자살을 하려 했다。하
지만 예술이 나를 살려내고 일어서
게 했다。나에게 부과된 모든 창조
를 완전히 이룰 때까지 나는이 세상
을 떠날 수 없다。
ㅡ베토벤의 <하일리겐 슈타트 유서 >
사뭇 달라진 민주로 내 마음도 기쁘다。민주를 볼 때마다 서울로 달려가 아들을 보고 싶고 아들을 이곳에 데려오고 싶다。민주처럼 달라져 있겠지。
“비쩍 마른 몸부터。。。”
부자가 상봉하기엔 아직 이르다는、딸아들 일곱을 키워낸 어머니의 심정은 내가 내 아들을 보고 어찌 운전할 수 있겠는가、마흔 살 아들인 나에 대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일 것이다。희망을 포기하며 내가 나를 참아낼 수 있었지만 아들에게 해대는 그들의 반인륜 만행엔 절망하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저쪽에서 선임한 나이 꽤든 변호사마저、
“어떻게 저런 집안과 한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까。이제라도 다행이라고 여기고。。。”
아무리 변호사라지만 불끈 주먹쥔 손을 올리려는 순간 아버지가 잡았다。
“다 내 잘못이다。”
이 말은 우리가 나을 것 없다던 부자 집안이라는 결혼의 조건을 부정하는 아버지 스스로의 자책이었다。그런데 손자까지。아버지만 탓할 일인가。부모를 거스를 수 없다는 나의 우유부단을 먼저 탓해야 한다。우유부단이야 말로 무조건의 순종이며 예의로 포장되기도 한다。하면 예의는 어긋난 착함이 되고 범절은 자신도 남도 그르칠 범죄가 될 수 있다。누군가에게도。
민주가 그림을 내민다。방긋 웃지만 까만 얼굴은 늘 무표정했다。무표정은 무기력한 체념으로도 보였다。민주의 손엔 유명한 베토벤 초상화가 들려 있다。
“이걸 그려 주세요。”
바로 대답했다。
“우리가 같이 그리면 되겠네。”
대답했지만 난감하다。종이 위에 그려 달라는 게 아니다。브람스나 쇼팽처럼 벽화로 크게、거리에 드러내 학교를 오갈 때 언제라도 볼 수 있게。。。 민주의 뜻이다。표어 같은 것일 께다。'나도 베토벤처럼'
구림면의 벽화는 다 사정을 품고 있다。'어디에?' 양순 씨와 상의했다。판단력이라 해야 할지 순발력이라 해야 할지、늘 양순 씨는 빨랐다。
“우리 여길、음악의 거리로 만들어 볼껴?
거 있잖여。 무슨 무슨 거리란 거。우리라고 못 할 거 없제。”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돈 잔뜩 들여 그린 벽화의 유행에 평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서다。잠시 가릴 뿐인 치장도 속임이다、이런 생각이었다。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끊기면 관리가 안 돼 칠이 벗겨지고 때나 곰팡이가 끼어 흉물이 된 여러 곳을 보았기 때문이다。자연스럽고 자발적이어야 한다。
“음악의 거리는 아직 이른 듯합니다。우선 민주의 소원은 꼭 들어 주고 싶은데。。。”
민주를 구림면 주민들이 만났다。그 전엔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 내려온 일들을 상의하는 게 고작이던 주민회의였으나 이번처럼 주민들의 발의로 주민이 모이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먼저 민주의 의견을 들었다。말을 더듬기까지 했던 민주가 제법 또박또박하게 자기의 뜻을 말한다。
“여기에서 읽었어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들어 보인다。베토벤 위인전이다。최근 구림초등학교 앞 길 건너 작은 도서관에서 빌렸다。귀로 들을 수 없는데 어떻게 노래를 만들 수 있었는지 궁금했단다。주민들은 의견이 분분했지만 상업적 의도가 아닌 민주라는 한 소녀의 소망을 담아낼 벽화라는 데는 뜻이 같았다。한 소녀의 소망으로 먼 독일의 베토벤이 이 시골 구림면에서 부활한다。눈치챈 양순 씨가 입을 열고 웃기 시작한 민주에게 더 많이 말할 기회를 줬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자 죽으려고도 했었나 봐요。그렇지만 자기에겐、아니 베토벤 아저씨에겐。。。”
어른들을 웃기며 민주도 빙긋 웃는다。
“작곡할 능력이 있고 이것을 꼭 더 잘 해내고 나서 죽겠다고 했나 봐요。”
앙다문 입이 '민주、 나도요。'라고 말하는 듯이 보였다。
“실제로 더 많은 곡을 작곡했다는데 저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유나가 대답한다。
“브람스의 짝사랑에 자주 가지 않니? 거기서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민주에 눈이 동그래진다。
“브람스만 있는 게 아니고요?”
이 때 였다。 또 양순 씨다。
“민주의 소원을 내가 꼭 들어 줘야겠구먼。작은 도서관 아래 가게가 문 닫은지 10년도 더 됐지 아마?”
남편 달범을 쳐다보자 동네 사정을 잘 아는 달범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그 양반이 돌아가신 게 13년이 됐으니 십삼 년이제。”
60년、그 자리에서만 문구점을 꾸려왔고 그곳에 2층 건물까지 지을 수 있었다。구림 주민들에게 소중한 어린 추억을 남겼지만 문방구를 찾는 학생들이 줄어들고 수입도 줄어들었다。부부는 여든 살이 넘었고 타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 누구도 이어받으려 하지 않았다。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큰아들 집이 있는 전주로 갔다。60년의 문구점 문도 닫아야 했다。
“그 어른의 아들이 내 동창이니 연락해 봐야겠네。”
“내 후배구먼。”
다친 셔터문 위에 베토벤 그림 하나 그려 넣자는 게 아니다。10여 년 만에 열린 셔터문 안으로 치우지 않아 아직도 수북히 쌓인 각종 문구들이 빼곡하다。후배가 교장인 구림초등학교와 중학교에는 달범 씨가 앞장섰다。그리고 면사무소엔 양순 씨가 나서려 하자 봉길이 “내가”하며 앞선다。
“이래 봬도 면사무소와 하는 일이 가장 많은 내가 적임자。”
라는 것이다。꽃길을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2주일 후 토요일에 구림 문방구를 연다。학생들은 와서 꼭 필요한 것들을 가져가라。몽땅 공짜다。'
이런 공문이 초-중학교와 면사무소에서 학생과 주민들에게 전해졌다。성대하고도 즐거운 문방사우 공짜선물 축제가 펼쳐졌다。그러고도 남은 것들이 많다。문구점 주인의 자녀들이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왔고 그들은 흔쾌히 그 가게를 주민들을 위해 내놓았다。'원하시는 대로' 진열대를 설치하고 남은 문구류를 종류별로 구분해 정리했다。책상과 의자도 갖다 놨다。<소녀의 기도 >를 매일 네 번씩 직접 연주해 들려주는 영임이 제안한다。
“베토벤 아저씨 문방구、 어때요?”
만장일치로 결정하려 하자 민주가、
“베토벤 아저씨의 이 그림에 이것도 옆에 써 주면 좋겠어요。”
'영원한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베토벤은 여러 명의 여인을 사랑했지만 결혼을 못 하고 평생 혼자로 살아야 했다。그녀가 누군지 모를 여인에게 쓴 편지가 '영원한 여인에게。。。'이다。
“그런 것도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에 들어 있다냐? 참말로。”
“그럼요。저는 굉장히 감동했어요。작곡가로는 성공했지만 사랑은 실패? 이루지 못한、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워요。저도 더 많이 커서 누군가에게 그런 편지를 받고 싶거든요。”
“쬐그만 게 벌써 연애 편지를?”
어찌 꾸지람이랴。똑똑한 민주로 어른들은 또 한바탕 웃는다。
“그려 좋아。그 글씨는 민주가 쓰는거다이。”
<베토벤 아저씨 문방사우 >에 양순 달범부부의 연락처가 적힌 메모를 붙였다。아무 때라도 연락하라는 건데、숙제를 하다가 또는 다른 어떤 것이라도 묻고 싶은 초-중생들은 이 번호로 SOS치면 양순이나 달범이 받아 숙제를 도와주고 질문에 답해줄 동네의 적절한 어른을 연결해 준다。양순달범부부는 자칭 '숙제도움교환원'이라고 불러 달라며 어깨를 으쓱한다。
“우리가 배운 게 없어 아는 것은 없어도 알만한 분에게 연결해 주는 것맨큼은 누구보다도 더 잘할 수 있응께。그럼 그럼。안 그려、 여보?”
달범이 아내 양순에게 윙크한다。
“무식한 우리 늙은이들이 어린 학생들을 위해 할 일이 생깅께 요즘 더 젊어지는 기분이 든단 말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