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이 뭐길래
“새 아파트의 장점이 그렇게나 많다니 비쌀 수밖에 없겠어요. 모두가 원할 테니까요. 그럼 30-40년 된 낡은 아파트는 좀 저렴한가요?”
“과연 그럴까? 구축 아파트 가격을 좀 살펴볼까나.”
삼촌이 스마트폰을 몇 번 터치하더니 40년이 넘은 압구정동 아파트의 시세를 조회해 정국이에게 보여준다. 시세를 본 정국이의 눈이 주먹만 해진다.
“곧 무너지게 생겼는데 왜 이렇게 비싼 거예요? 이해가 안 가요.”
“이제까지 어떤 집이 인기가 좋다고 했지?”
“새 아파트! 그래요. 새 아파트 좋은 건 잘 알겠어요. 그런데 여기 40년도 넘은 된 아파트 사진 좀 보세요. 엄청 낡고 우중충하잖아요. 벽에 여기저기 금도 가 있고 페인트도 빛이 바래 누렇다고요. 게다가 저런 곳은 주차 공간도 턱없이 부족해서 출근 시간에는 주차장에서 차를 직접 밀어서 빼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곳이 저렇게 비싸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요.”
삼촌이 빙긋 웃으며 묻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선호하는 새 아파트는 어떻게 생겨날까?”
“네? 콘크리트 씨앗을 심어 키운 건 아닐 테니 빈 땅에 건축하는 거겠지요?”
“근데 정국아, 잘 생각해 봐. 우리가 그동안 서울 여기저기를 다녔는데 아파트를 지을만한 큼지막한 빈 땅을 본 적이 있니?”
정국이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새삼 놀란 듯 소리친다.
“헉!! 빈 땅이 없네요! 그럼 더는 새 아파트가 생길 수 없는 거예요?”
“하하… 땅이 없으면 마련해야겠지? 바로 낡은 아파트를 허물고 다시 짓는 재건축을 통해 새 아파트를 공급하는 거란다. 서울의 새 아파트 상당수가 낡은 아파트를 재건축한 것들이야.”
“결국은 이 낡은 아파트도 새 아파트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기대가 반영된 가격이란 말이군요!”
“그렇지. 한발 더 나아가면 서울의 경우 재건축 연한이 30년인데, 이 말인즉슨 준공 후 30년이 넘어가야 비로소 재건축을 위한 기초적인 자격을 얻는다는 말이야.”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어중간하게 낡은 것보다 30년이 넘은 아파트가 오히려 인기가 더 많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지. 게다가 30년이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재건축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거주하기 위험하거나 불편할 정도로 충분히 낡은 게 맞는지를 판단하는 안전진단도 받아야 하고, 재건축 진행을 위한 조합설립, 시공사 선정 등의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나가야 해. 세부적인 건축 계획이나 주변과의 조화에 대해 지자체와 협의도 있어야 하고 말이야. 물론 이 모든 단계에서 아파트의 공동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유주들이 일정 비율 이상 뜻을 같이 해야 함은 기본이지!”
“쉬운 일이 아니긴 하네요. 그런데 비슷한 때에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 중에 어떤 곳은 아직 낡은 상태 그대로 남아있고, 어떤 곳은 이미 재건축된 지 10년이 넘은 경우도 있는데, 그건 왜 그런 거예요?”
“오, 예리한 질문이네. 반포주공아파트를 예를 들면 1단지는 2023년 기준으로 한창 재건축 추진 중인 반면, 2단지는 반포래미안퍼스티지로, 3단지는 반포자이로 재건축되었어.”
“이름으로 유추해 볼 때 1단지가 2, 3단지보다 먼저 생겼을 것 같은데요?”
“맞아, 반포주공 2∙3단지는 1978년, 1979년에 각각 지어져 두 단지 모두 2009년에 재건축된 반면, 1단지는 1973년에 지어졌는데 아직 재건축을 추진하는 중이야.”
정국이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다시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나요? 더 오래된 게 먼저 새 아파트로 변신하는 게 순리 아닌가요? 형님 먼저. 언니 먼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재건축에는 여러 절차와 단계가 있고, 각 단계별로 일정 비율 이상의 주민 동의율이 필요해. 한 가족 사이에서 외식 메뉴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수백, 수천 세대가 모여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대다수가 동의하는 확정안을 도출하는 게 쉬운 일이겠니? 재건축 과정에서 조합장이나 임원진을 해임시키거나 조합을 중도에 해산하는 경우도 있단다. 시공사와 재건축 조합 간의 분쟁도 단골 메뉴고 말이야.”
정국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삼촌이 말을 잇는다.
“정권의 변화나 주택 공급에 대한 정부의 의지나 태도도 중요한 변수야. 주택시장의 과열을 잠재우기 위해 사업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제도를 만들기도 하고, 침체된 시장의 되살리기 위해 제공했던 혜택의 시효가 지나버리는 경우도 있어.”
“정부의 정책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단 말인가요?”
“정부의 의도가 무엇이건 정책의 변화가 아파트의 재건축 의지를 꺾어버릴 수도 있지. 대표적으로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도’라는 게 있어.”
“이름이 꽤나 복잡하네요.”
“그렇지. 단어의 앞 자를 따서 ‘재초환’이라고도 불러. (재건축 추진위원회 구성 승인일부터 준공 때까지 재건축을 통해 조합원이 얻은 이익이 1인당 평균 3,000만 원을 넘을 경우 초과 이익의 최고 50%를 부담금으로 환수하는 제도. 2006년에 처음 시행되었는데, 주택시장 침체 등의 이유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유예됐다가 주택 경기가 살아난 2018년부터 다시 시행되었다.) 강남 등지는 이 재초환 금액만 수억에 달한다 하니 적용이 유예되다 다시 부활한 2018년 이후부터는 아무래도 재건축을 추진하는 데 있어 주민들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렇겠네요. 세금 같기도 하고 강제로 걷는 기부금 같기도 하네요. 이런 제도를 피해 가느냐 마느냐가 조합원들 입장에서는 중요한 이슈겠어요.”
“그렇지, 어떤 곳은 정권이 바뀌면 부동산 제도, 과세 체계 등이 바뀔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일부러 진도를 늦추는 전략을 세우기도 해.”
“하.. 어렵다. 암튼 그런 역경을 뛰어넘어 주민들이 똘똘 뭉치면 헌 집이 새 집이 되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야.”
“무슨 스무고개 하시는 거예요? 뭐 이리 허들이 많나요!”
정국이가 기가 찬다는 듯이 소리를 높인다.
“가장 기본적인 게 남아 있지. 바로 사업성! 주민들이 재건축을 원한다고 해도 사업성이 좋지 않으면 추진이 쉽지 않아. 예를 들어 어떤 지역이 200%로 건축이 가능한 일반주거지역인데, 현재 아파트 용적률이 이미 200%에 가깝다면 추가적으로 연면적이 늘어나기 어려울 테니 주민들의 분담금이 커질 거야. 건설사도 일반분양분을 통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울 거고. 반면에 현재는 150% 용적률의 아파트인데, 그간 전철역도 생기고 큰 도로도 주변에 생기면서 준주거지역으로 용도지역이 상향되어 용적률 500%로 건축이 가능해졌다고 가정해 볼까?”
“사용할 수 있는 연면적이 2배도 넘게 늘어난 건가요?”
“느낌이 오니? 그렇게 되면 지금 단지 규모가 1,000세대라고 가정할 경우, 2,000세대를 넘는 규모의 새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지? 무려 1,000세대가 이상이 늘어나는 셈이니 얼마나 사업성이 좋겠니. 정부에서 요구하는 임대주택이나 공공시설을 공급하고, 설계 비용과 건축 비용 등을 모두 고려한다 해도 주민들은 더 넓은 새 집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물론 저렇게 매력적인 사업지는 이미 대부분 새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된 경우가 많고, 아직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 가치가 반영되어 가격이 절대 싸지 않아. 아까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찾아본 그런 곳처럼 말야.”
“현재 용적률은 낮을수록 좋고, 건축 가능한 기준 용적률은 높을수록 좋겠군요. 그래야 뻥튀기가 많이 되잖아요.”
"뻥튀기라.. 어휘의 느낌이 좀 저렴하지만 맞는 말이야.”
“설명을 듣다 보니 이 재건축이라는 게 험난한 여정을 한 단계 한 단계 밟아나가는 퀘스트 게임 같네요. 재건축 과정이 길게는 10년도 넘게 걸린다니 인간 인생의 10% 이상에 걸쳐있는 거대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겠어요.”
✪ 흥미 충전
- 한국에서 가장 큰 아파트 단지는 어디일까?
정답은 송파구 가락동의 헬리오시티 아파트입니다. 가락시영아파트를 재건축한 단지로 무려 9,510세대의 규모입니다. 모든 집에 친구가 있어 매일 한 집씩 놀러 갈 경우, 무려 26년이 넘게 걸리니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지요? 그런데 이 기록마저도 오래가진 않는다고 해요. 둔촌 주공아파트를 재건축하고 있는 ‘올림픽파크 포레온’는 무려 1만 2천 가구 규모입니다. 이젠 친구 집 방문에 32년이 넘게 걸리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