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옷깃을 세우면 우산 없이도 기분 좋게 걸어갈 수 있을, 딱 그 정도의 비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베란다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이 빗줄기 때문에 잘게 부서졌다. 취기까지 더하니 가 본 적도 없는 시애틀이 갑자기 그리워지는, ‘센티함’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돼 버리고 말았다.
누구와 마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큰히 술이 오른 상태였던 것만 기억난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보송보송해지니 술이 더 마시고 싶어졌다. 아무렴, 센티한 밤에는 술이 필요하지. 보스락거리는 비닐봉지를 거칠게 열고 주섬주섬 캔 맥주를 꺼내 땄다. 손잡이를 꺾자 똑하고 주둥이가 열렸다. 이내 탄산과 함께 팡 터지는 이 청량감. 언제 들어도 반가운 이 소리.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소중한 캔 맥주를 손에 꼭 쥐고 혹시 옷장에 우리 까불이들이 갇혀 있을까 싶어 집 안을 이리저리 헤맸다. 소리의 근원은 베란다로 추정됐다. 베란다 문을 열자 애타는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고양이 화장실 문을 모두 열어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맛동산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환청이 들리는 걸까. 아니 애초에 환청으로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는 게 흔하기나 한 일일까.
그때였다. 울음소리와 함께 베란다 창문을 긁는 소리가 났다. 센티한 밤이 공포스러운 밤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두려움이 정수리를 타고 발끝까지 주욱 퍼졌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손에 쥔 캔 맥주만은 놓치지 않았다. 아주 소중하니까. 창문 밖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 위에 작고 검은 형체가 보였다.
고양이었다. 다행히 귀신은 아니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아직 귀신이 무섭구나. 공포감이 사라지고 이내 안도감이 찾아왔다. 냥이와 오래 지내다 보면 대화를 하게 된다. 우리 집 고양이가 아니라 해도 말이다. 술까지 취했으니 더욱 말을 걸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나저나 아무리 1층이라지만 실외기 위까지 어떻게 올라온 것일까.
실외기 위의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야옹아. 그런데 너 마끼랑 진짜 똑같이 생겼다."
창밖의 낯선, 그러나 어딘가 낯설지 않은 고양이가 대답했다.
"야옹"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올라왔어? 밟을 데도 별로 없는데."
녀석이 성을 내기 시작했다.
"야옹! 야옹!"
울음소리도 낯설지 않았다.
"너 마끼랑 울음소리도 되게 똑같다. 신기하다......"
내가 술이 많이 취했나. 길고양이가 분명한데 왜 자꾸 마끼로 보이지. 어, 잠깐. 잠깐만...
"마끼? 마끼니? 마끼야!!!”
길고양이가 아니라 마끼였다. 자신을 이제야 알아본 집사 때문에 서러움이 터졌는지 마끼는 더욱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도대체 어떻게 나간 걸까. 고양이란 존재는 사람이 안 볼 때는 혹시 손이 생겨서 창문도 열고 컴퓨터도 하고 간식 캔도 몰래 열고... 사실은 그랬던 걸까. 그보다 비도 오는데 거길 왜 나간 걸까. 목욕을 안 시켜 줘서 그런 걸까. 그런데 너 목욕 싫어하잖아. 한편으로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실외기 위에서 용케 버틴 마끼가 대견했다. 아마 방충망에 발톱이 걸려 창문을 열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유연한 몸으로 그 좁고 무거운 유리창 틈을 비집고 나간 거겠지.
그날, 마침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매일 밤, 잠을 설쳤을지도 모른다. 마끼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른 채 죄책감에 시달렸을 게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웃기면서도 아찔하다. 괘씸한데 천만다행이다. 하마터면 악덕 집사가 될 뻔했다. 비에 쫄딱 젖은 마끼를 닦아 주고 창문을 모두 걸어 잠근 후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아이고, 마끼야...
놀란 마음에 비에 젖은 마끼를 꼭 안아 주었던 게 기억난다. 이날은 웬일인지 마끼도 버둥거리지 않고 잘 안겨 있었다.
실외기가 나가고 싶은 곳에 위치해 있기는 하다. 말 안 듣는 못된 고양이에게는 구속복을 선물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