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키우는 사람들을 개집사라고 하는 걸 알게 되었다. 개집사라... 왠지 입에 착 감기면서도 개를 키우는 분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마구 드는 어감이다. 노파심에 일반적으로 쓰는 말이란 걸 몇 번의 검색을 통해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글로 옮길 수 있었다.
한번은 개집사인 친구네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하마터면 크게 실수할 뻔한 적이 있다. 반가움을 표시하며 무릎 위로 올라온 강아지를 나도 모르게 높은 곳에서 그대로 놓으려 한 것이다. 냉장고 위에서도 펄쩍 뛰어내리는 게 다반사인 고양이들에게 너무 익숙해진 것일까. 다행히 친구에게 쫓겨나지 않고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왼손이 하려던 일을 오른손이 잽싸게 막은 덕분에 말이다. 그 반대였던가? 여하간 착한 자아 분열 인정한다.
친구네 강아지 ‘보리’. 토실토실한 게 아주 귀엽다. 하마터면 이 귀여운 강아지가 나 때문에 다칠 뻔했다.
고양이와의 오랜 동거에서 비롯된 나의 경거망동(?)은 집에 놀러온 조카에게도 예외가 없다. 아직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조카의 관심을 끌고자 입으로 ‘쭙쭙’ 소리를 내는 것부터 내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손가락을 조카의 코에 갖다 대는 것까지. 고양이와 얽힌 귀엽고 민망한 실수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느낀 고양이와 개의 차이에 대한 감상도 모아 봤다. 준비가 되었는가?
마끼와 놀고 있는 친조카. 두 살배기 조카는 집에 오면 고양이부터 찾는데, 항상 멍멍이라고 한다. 야옹이라고 가르쳐 주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냥집사 캣브로의민망한 이야기
개집사인 친구네에 놀러갈 때마다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바로 꼬리를 흔들고 이리저리 방방 뛰며 격하게 환영하는 귀염둥이 보리 때문이다. 성격 좋은 고양이들을 왜 개냥이라고 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그리고 아무리 개냥이라 하더라도 진짜 강아지한테는 안 된다는 것도. 고양이나 개나 집사를 반기는 마음이야 비슷할지 몰라도 표현 방식이 사뭇 다르다. 고양이가 “어, 우리 집사 왔니? 일 봐~” 정도의 느낌이라면, 개는 “형아! 왜 이제 왔어! 빨리 와서 나 안아 줘! 빨리! 빨리! 우리 못 본 지 벌써 1시간이나 됐다고!” 정도의 느낌이다.
“어이, 츠동이 보고 있나? 손님맞이는 이렇게 하는 거다.” “어이? 어이가 없네. 이 자식이, 쉬고 있는데 귀찮게 사람 데려오지 말라니까.”
친구는 강아지를 안을 때도 너무 높이 들지는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품에 안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크게 짖는 바람에 상을 엎을 뻔한 적도 있다.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아는 사람인가 보다. 한편 개는 고양이보다 우렁차게 짖어 대긴 하지만 털뿜뿜이 덜해서 좋다는 유치한 생각도 들었다.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흔드는 개와 기분이 언짢으면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에 대한 상식은 워낙 유명해서 말할 것도 없고, 강아지에 대해 한 가지 놀랐던 점은 배를 만져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싫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좋아한다. 또 하나 신기했던 점은 사람이 먹는 과자에도 욕심을 엄청 낸다는 것. 그렇지. 개는 잡식동물이었지.
“보리야, 건강해야 한다. 친구는 아파도 되는데 너는 아프면 안 돼.”
개집사와 비반려인 친구들의 웃픈 이야기
반대로 개를 키우는 지인들이 놀러 오면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고양이도 안아 주면 좋아하는 줄 알았다가 난생처음 보는 고양이 하악질에 쫄아서(?) 다시는 만지지도 못한다든가. 귀여운 애교를 기대하며 배를 만졌는데 냥냥펀치 한 대 맞고 정신을 못 차린다든가. 여차저차 힘들게 냥이를 안고 기분 좋은 묵직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내 온통 털 범벅이 된 옷을 바라보며 애꿎은 나를 원망하는 일도 많이 겪었다.
친구들과 집에서 맥주 한 잔 하다가 보면 이런 일도 벌어진다. 한 친구가 옆에서 지켜보는 고양이의 따가운 눈초리에 안주로 먹던 과자를 준다. 다른 친구가 한심하다는 듯이 욕을 섞어 말한다. “멍청한 XX야, 고양이 육식동물인 거 모르냐? 과자 안 먹어.” 그런데 여기서 반전. “어? 얘 과자 먹는데?” 친구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건강식만 좋아하는 마끼와 달리 츠동, 구로, 루비는 가끔 과자도 먹는다...(그렇지만 웬만하면 못 주게 한다.)
ㄴr는 ㄱr끔 과자를 먹는ㄷr...
지금이야 친구들도 고양이가 익숙해져서 궁디팡팡도 아주 자연스럽고 다가가기 전에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손부터 주지만, 처음에는 고양이 데리고 산책 나가 봐도 되냐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옆에 있는 줄도 몰랐던 고양이가 다리에서 갑자기 물컹하게 느껴져서 놀라 자빠지는 것은 예사다. 때로는 식탁 위로 펄쩍 뛰어오르는 녀석들 때문에 아주 기겁을 하기도 했다. 냥이들이 기척을 거의 내지 않고 다가오는 탓이다. 고양이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은 이것 말고도 아주 많지만 이 한 편에 다 풀어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쭉 쓰고 보니 어떤 관계에서도 ‘길들임’의 과정이란 일방적이지 않은 것 같다. 집사들과 함께 잠에 들고 아침이면 일어나는 고양이. 그리고 작은 동물 친구들 앞에서는 세심하고 여린 소녀처럼 변하는 우리들. 소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사막여우의 말이 생각난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그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 마침내 서로가 서로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 어린 왕자를 따라 되뇌어 보니 다음 문장이 나왔다. “나는 내 고양이들한테 책임이 있어. 언제까지나 나를 길들여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