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사진을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은
냉소적이든 인간적이든 감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지식은 싸구려 지식, 즉 가짜 지식이자 가짜 지혜이다.
- [사진에 관하여] 수전 손택 (Susan Sontag)
하나...
텔레비전을 켰다. 조용하고 어둡던 방에 금세 웅성웅성 활기가 돌아서 석준은 그제야 자신의 집이 정말로 자신의 집같이 여겨졌다. 빨리 푹신한 소파에 머리를 묻고 나른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검은색 서류 가방과 쥐색 코트를 탁자 위에 함부로 던져 놓고 리모컨부터 찾기 시작했다. 이놈의 리모컨은 또 어디로 갔나. 언제나 이 젠장맞을 리모컨이 문제였다. 필요할 때면 이상하리만치 눈에 띄지 않는 리모컨을 찾으려고 가죽 소파 구석구석을 후비는 동안 그는 불같은 염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나. 누가 뭐래도 리모컨 없이 텔레비전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텔레비전을 지배할 것이냐 텔레비전에게 지배당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잠시 후, 그는 탁자 밑에 쌓여있던 신문지 사이에서 리모컨을 찾아냈다. 왜 리모컨이 신문지 틈에 끼어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낮에 출근하면서 신문지 더미와 함께 탁자 밑에 던져버렸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리모컨을 손 안에 쥔 석준은 만족스럽게 한숨을 돌렸다.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흰색 가죽 소파 한 가운데 엉덩이를 비비적거리며 최대한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소파에 몸을 밀착시킨 석준은 리모컨으로 차례차례 채널을 돌려대기 시작했다. 채널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돌아갔다. 그 모습이 꽤나 무성의해서 딱히 텔레비전 시청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텔레비전을 켜서는 잠들기 직전에야 겨우 끄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다만 그에겐 채널을 계속 바꿔줘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프로를 재미있게 보고 있을 때조차 잠깐씩 채널을 바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도 좀이 쑤셔서 차라리 빨리 이 프로가 끝나고 마음껏 채널을 돌릴 수 있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하나의 화면에 집중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무작위로 돌아가는 채널들이 쏟아내는 가지각색의 편린과 소음에 게으르게 도취되는 편이 그는 훨씬 더 좋았다.
어쩌면 그가 텔레비전 앞에서 하고 있는 건 ‘시청’이 아니라 ‘방관’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힘없는 자의 무력한 방관이 아니라 모든 힘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자의 우월한 방관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절대적으로 리모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실 석준은 리모컨이야 말로 텔레비전보다 더 위대하고 혁명적인 발명품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대단한 물건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만약 리모컨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채널 하나를 돌리기 위해 직접 텔레비전 앞에까지 쪼그리고 다가가거나, 어쩔 수 없이 같은 채널을 계속 보고 있어야만 했을 게 아닌가.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 수고와 일상의 불편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내 거실까지 침투해 들어온 자본주의적 굴욕이요, 노동이요, 착취였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리모컨을 손에 틀어쥐는 순간 전세는 곧바로 역전돼 버린다. 심지어 입을 열어 이러쿵저러쿵 명령을 내릴 필요조차 없다. 그저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서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루의 피로와 텔레비전 화면의 번쩍이는 불빛에 지친 석준의 시야는 점점 몽롱해졌다. 마치 몸은 이미 잠들었는데 정신만은 어렴풋이 깨어서 계속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그의 시간은 이미 멈추었고 텔레비전 안에서만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시간 대신 채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걸까?
엔터테인먼트 채널에서는 얼마 전 자살한 여배우에 대한 특집방송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 여배우는 화장실 문고리에 수건을 걸고 목을 매 죽었다고 한다.
“한국 최고의 여배우 중 한명이었던 그녀가 왜 자살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나운서는 필요 이상으로 엄숙한 목소리를 지어내고 있었다. 자살이라니, 34년을 살아오면서 그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로서는 자기 자신을 죽여야 될 만큼 중요하거나 괴로운 일이 있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죽는다는 것…….]
그는 별다른 감상 없이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어쩌면 죽는다는 건 생각만큼 거창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는 엄지손톱 끝을 움직여 엔터테인먼트에서 음악방송으로 채널을 바꾸었다.
[나른하게, 조용히]......[천천히 멀어지지만].......[아무 미련도 없고, 별 거부감도 없이]........[당연하다는 듯이]........[물에 떨어진 휴지 조각이 뭉근히 풀어져 가는 건].......[위아래가 없는]........[평평하게]........[무심하게].........
석준은 채널을 바꿀 때마다 토막토막 끊어서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요점이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느릿느릿 한 단어씩 떠올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일련의 사고는 그의 머리를 명쾌하게 해주기는커녕 더욱 흐리멍덩한 상태로 만들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홈쇼핑으로 채널을 돌리는 순간 까맣게 사라지고 말았다.
처음에 그는 그것이 화장품 판매인줄 알고 채널을 멈추었다. 화면이 꽤나 오랫동안 여자 모델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홈쇼핑의 화장품 판매를 좋아했다. 여자가 아름답게 변해가는 걸 시시각각으로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믹서기 판매였다.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짙게 화장을 한 화면 속의 여자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분홍색 믹서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여자는 그 분홍색을 ‘베이비 핑크’라고 불렀다. 그는 화장품 판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채널을 돌리려고 했지만 화면 속 여자가 매력적이었고 또한 매력적인 믹서기였기 때문에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믹서기 속에 통째로 집어넣은 양파, 사과, 마늘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초록색의 걸쭉한 액체가 되는 건 의외로 볼만한 장면이었다. 그 결과물을 보여주려고 믹서기를 들어 올리는 순간 깨끗하게 다듬어진 손톱의 하늘색 매니큐어가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석준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축축하고 질척한 초록색 액체를 그 예쁜 손가락이 듬뿍 퍼 올려주기를 - 가령 얼마나 잘 갈렸는지 시청자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 그는 내심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그녀는 믹서기가 얼마나 간편하게 세척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내용물을 모두 하수구에 쏟아버렸다. 초록색 액체는 묽게 풀어지더니 순식간에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곧바로 채널을 돌려버렸다.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기독교 채널로, 기독교 채널에서 요리 채널로, 요리 채널에서 영화 채널로, 영화 채널에서 게임 채널로, 게임 채널에서 뉴스 채널로, 그리고 만화 채널로, 그렇게 석준은 계속해서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몇 백 개나 되는 채널들의 한 바퀴를 다 돌아 다시 1번으로 돌아와 있었다. 석준은 그제야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엉덩이를 움직여 무게 중심을 바꾸고는 다시 1번에서 2번으로, 3번으로, 4번으로, 5번으로, 6번으로, 7번으로 채널을 바꾸어 나갔다. 몇 시간 전 그 채널들에서 하던 프로그램들은 이미 끝나고 다른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채널들의 끝없는 행렬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텔레비전에는 대여섯 개의 채널만 있어서 끊임없이 채널을 돌린다는 게 별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채널은 몇 백 개를 넘어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히 돌려보는 데만 해도 30분이 족히 걸렸다. 그 중 몇 군데에서 잠시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두세 시간쯤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다. 정말 좋은 세상이라고 석준은 생각했다. 평생 동안 방구석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오로지 텔레비전 화면만 보며 살아도 전혀 지루할 것 같지가 않았다.
다시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그는 어깨와 팔목에서 - 특히 리모컨을 들고 있는 오른팔에서 - 뻐근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몇 발자국 옆에 놓인 침대를 힐끗 쳐다보며 알맞게 딱딱한 매트리스의 탄력을 떠올렸다. 시간은 이미 새벽 두 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말 졸린 걸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괜히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가 캄캄한 이불 속에서 멀뚱하니 내일 있을 일들을 짚어보거나 다시 일어나 텔레비전을 켜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아직 나가떨어질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린 석준은 좀 더 텔레비전을 보기로 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주식 채널에서 낚시 채널로, 그리고 다시 불교 채널로 옮겨갔다. 밤이 깊어서 그런지 흥미를 끄는 프로도 없었고 슬슬 정말로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도 그는 텔레비전을 끌 수가 없었다. 몇 시간동안이나 계속해온 행동에는 관성이 있어서 나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게다가 끝없이 돌고 도는 채널의 연속 속에서 멈출 곳을 찾는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쯤 되면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텔레비전을 끌 기회를 잡기 위해 계속 채널을 돌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석준이 불교에서 골프로, 그리고 다시 영화로 채널을 돌렸을 때, 거기에는 막 한 쌍의 백인 남녀가 붉은 카펫 위에서 서로의 옷을 벗기고 있는 중이었다. 석준은 리모컨 버튼을 집적거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텔레비전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짙은 암갈색 머리카락의 여자와 밝은 금발 남자의 반라의 몸은 놀랄 만큼 유연하고 아름다웠다. 두 사람의 얼굴은 밝은 살구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큰 입 때문인지 서로 묘하게 닮아 보였다. 별안간 남자의 손이 여자의 가슴을 거칠게 문지르자 기대 이상으로 큰 여자의 유방이 브래지어 밖으로 불쑥 튀어 나왔다. 그 덜렁이는 가슴을 남자의 단단하고 마른 손가락이 힘껏 움켜쥐는 순간 석준은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입술을 오므렸다. 남자의 길쭉한 손가락의 투박한 선과 움틀거리는 손등의 핏줄들이 정성껏 클로즈업한 여자의 두부 같은 가슴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석준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붉은 입술을 한껏 벌린 여자의 젖혀진 얼굴에 겹쳐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그러쥐듯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자 손가락에서 손등으로 연결되는 가느다란 뼈와 그 뼈만큼이나 굵은 핏줄들이 팽팽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것은 지금 막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꿈틀거리는 남자의 등과 비슷했다. 여자의 길고 아름다운 팔 다리가 남자의 등을 휘감고 올라가 뒤엉키는 것을 보면서 석준은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왼손을 집어넣었다. - 오른손이 더 편했겠지만 오른손으로는 리모컨을 잡고 있어야 했다. - 뒷목에 달라붙은 남자의 황금색 머리카락은 어느새 땀에 젖어 반짝였고 탄탄한 어깨는 짙은 노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석준은 왼손을 바지 속에서 움직이면서 오른손으로는 계속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가로 5cm, 세로 17cm, 두께 4cm의 리모컨은 익숙한 느낌으로 그의 오른손을 꽉 채우고 있었다. 딱딱하면서도 맨들맨들한 플라스틱 표면과 두둘두둘한 고무 버튼들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면서 그는 마치 목마른 사람처럼 여러 번 침을 빨아 삼켰다. 어느새 화면속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석준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여러 마리의 새들이 한꺼번에 날개 짓하는 소리가 방안 가득 어지럽게 날리고, 석준은 그 소리를 피해 소파 등받이에 땀이 밴 축축한 이마를 문질러댔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는 갈색머리 여자의 것인지, 금발 남자의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것인지 모를 신음 소리를 들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석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화면 속의 남녀는 아침 햇살이 비치는 식탁에 마주 앉아 서로의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면서 토스트와 오믈렛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석준으로서는 이 영화를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만큼 녹초가 되었고, 빨리 바삭바삭하고 어두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석준은 땀이 배어 끈적거리는 리모컨을 옷에 쓱 문지르고는 텔레비전을 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