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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an 11. 2023

구멍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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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원에서 돌아와 대문을 열자 조용해야 할 집안이 부산스러웠다. 텔레비전을 끄지 않고 출근했던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창백한 빛과 겹겹이 중첩되는 뿌연 그림자 때문에 그의 방은 마치 초점이 맞지 않는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보였다. 그는 이런 흑백의 광경을 흑백사진으로 찍는다면 과연 어떤 사진이 나올지 잠깐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이제 가족 행사나 여행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그가 사진기에 손대는 일은 없지만, 아직까지도 예전 버릇이 남아있어서 가끔 눈앞의 장면을 눈짐작으로 어림해 보곤 했다. 

     카메라 조작의 간편함에 이끌려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그가 굳이 칼라가 아닌 흑백 사진을 선택했던 건 일반인들 대부분이 그렇듯 그것이 좀 더 예술적이고 고상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흑백사진은 아무렇게나 찍어 놓아도 흑백사진 특유의 초월적인 분위기와 명암의 대비 효과로 인해 멋들어져 보이기 마련이었다. 한마디로 석준과 같은 초짜 취미생들이 적당히 만족하기에 용이했다. 흑백사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과 속물 사이에 우연히 끼어들어 그대로 산화된 것 같았고, 그런 소위 멜랑콜리한 우울함이 그에게는 마치 예술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 비슷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자신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가 흑백사진에 끌렸던 진짜 이유는 단순히 멜랑콜리한 감상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우울함마저 무심히 짓눌러 버리는 사진의 기계적인 확실함과 냉담함 때문이었다. 어떤 강렬한 색깔도, 어떤 격렬한 감정도, 어떤 도발적인 물성도, 사진 속에서는 납작하게 눌려 편편해 지고야 마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 관대하지도 않은 - 다시 말하면 모든 것에 집착하고 또 모든 것에 관대한 - 그 무심한 평면성에 그는 온전히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흑백사진 중에서도 특히 그가 좋아했던 건 인물 사진이었다. 흑백사진과 마찬가지로 초보자에게 인물 사진만큼 쉽고 만만한 상대도 없었다. 아무리 형편없이 찍더라도 보는 이의 눈길을 끌지 않는 인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그는 수백 장의 인물 사진들을 찍었다. 처음에는 공공장소나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찍어댔지만, 사진을 그만두기 얼마 전쯤에는 주변 사람들을 찍고 있었다. 그 당시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현상하면서 그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사진 속의 가족,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을 만큼 낯설어 진다는 것과, 반대로 사진 속의 낯선 이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참을 수 없을 만큼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자신의 작은 방을 바라보면서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방안의 가구들이 그림자 속에서 불쑥 불거져 나왔다. 어쩐지 조금씩 위치가 바뀐 듯해서 그는 잠시 동안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 당연한 일이지만 - 아무 것도 바뀐 건 없었다. 모든 것이 한 치도 틀림없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석준은 어둠 속에서보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훨씬 좁아 보이는 방을 단숨에 가로질러 가방과 코트를 의자에 걸쳐 놓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 잡동사니 속을 뒤적이면서 리모컨부터 찾기 시작했다. 책상 바로 옆에는 커다란 창문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빛나고 있었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사실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감탄해마지않을 정도로 그의 방은 전망이 좋았다. 하얀색 송신탑이 솟아 있는 남산이 저 멀리 정면에 있고, 창문 구석 쪽으로는 비뚜름하게 한강도 내려다 보였다. 석준도 이 전망 때문에 이른바 ‘조망권’에 대한 값을 더 치루고 이 원룸에 세를 얻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가 창밖 경치를 성의 있게 감상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경치를 바라보면서 차나 맥주를 마시려고 창가에 두었던 티 테이블도 걸리적거려서 치워버린지 오래였다. 이제 그는 그곳에 창문이 있는 것조차 모른다는 투였고, 비나 눈이 오는 날에나 눈살을 찌푸리며 겨우 창밖을 흘끗 바라볼 뿐이었다. 

     석준은 소파 쿠션 밑에서 리모컨을 발견하자마자 그것이 도망이라도 갈지 모른다는 듯 손아귀에 덥석 움켜쥐었다. 그리고 넥타이와 양말을 벗어 책상 옆에 던져버리고는 소파에 가능한 한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이 순간을 위해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의기양양하게 텔레비전을 켜자 채널은 어젯밤 자기 직전까지 보았던 요리 프로에 맞추어져 있었다. (어제는 꿀, 사과, 백포도주로 맛을 낸 생선구이 조리법이 방영되었었다. 사과와 생선이 섞인 맛을 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주 흥미진진했다.) 화면에서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국인 요리사가 구운 소고기 덩어리를 커다란 중식도로 썰고 있는 중이었다. 갈라지는 두툼한 고기의 섬세한 결사이로 흘러내리는 맑은 갈색 육즙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그는 저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는 무언가 먹을 걸 찾기 위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냉장고를 열었다. 하지만 냉장고 안에는 먹다 남은 쓰레기와, 지저분한 플라스틱 포장 용기, 구겨진 포장지뿐이었다. 

     그가 우유팩 하나만 꺼내들고 다시 소파로 돌아왔을 때는 황갈색 소스가 뿌려진 소고기 위에 큼직하게 썰어 볶은 양파와 감자가 곁들여 지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란 감자 때문에 다시 입안에 침이 고인 석준은 들고 있던 우유를 들이켰다. 그러나 냉장고 냄새와 비슷한 밍밍하고 비릿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져서 속이 다 매슥거렸다. 우유팩을 저만치 탁자 구석에 밀어놓고, 석준은 다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댔다. 롯데와 두산의 야구경기가 한창인 스포츠 채널, 생물 핵심 문제를 풀고 있는 교육 채널, 붉은 머리의 외국인 아이가 춤을 추고 있는 영어 채널, 한 무리의 남자들이 20인용 자전거를 타고 있는 코미디 채널……. 뉴스 채널에서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기상케스터가 내일의 날씨를 알려주고 있었다. 날씨가 궁금하진 않았지만 목이 시원하게 들어난 여자의 단발머리와 갸름한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그는 주의 깊게 화면을 바라보았다. 

     “3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내일은 맑고 화창해서 완연한 봄 날씨가 될 전망입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그러고 보니 어느새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성큼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석준은 계절의 변화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학원 강사의 일상이야 수능이 임박한 늦가을을 빼고는 사계절 내내 비슷했다. 그저 떠오르는 건 벌써부터 난방을 줄이고 있는 학원이 야속하다는 불평 정도였다. 그렇게 여자의 하얗고 단정한 이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석준은 별안간 몸을 일으키며 어깨를 떨었다. 3월의 마지막 일요일. 내일이 바로 시연의 결혼식이었다. 

     “......하고 있어 평년 기온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기가 그리 건조하지는 않겠습니다. 내일은 가족과 함께 나들이 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 되겠네요. 가까운 공원에라도 나가보시면 어떨까요. 그래도 저녁에는 빨리 기온이 떨어질 수 있으니 따듯한 겉옷 하나쯤은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은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 속으로 흩어지는 대리석 분수의 투명한 물줄기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석준은 기억을 더듬어 5년 전 자신의 결혼식 날을 떠올려 보았다.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날도 화창한 날이었던 듯했다. 그래도 지금 화면에 나오는 것처럼 눈부시게 화창한 날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일 날씨가 좋다고 해서, 어쩌면 자신의 결혼식 때보다 훨씬 더 좋다고 해서 특별히 기분이 상하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 날씨가 형편없었다면 은근히 기쁘지 않았을까 그는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개나리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죠? 그럼 봄이 시작되고 있는 3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노란색 개나리꽃이라니, 재혼과는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라고 그는 넌지시 비꼬았다. 그래도 시연은 아직 서른 살 초반에 몸매도 날씬해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처녀처럼 잘 어울릴 것이다.

     석준과 시연의 결혼식 날은 단풍이 완연했던 가을인데도 몹시 더웠었다. 게다가 입고 있던 새 턱시도 양복이 목과 팔을 죄어서 그는 결혼식 내내 불편했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화장을 곱게 한 얼굴로 흰 장미꽃을 한 아름 안고 날씬하게 걸어오던 시연은 그 모든 걸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예뻐 보였다. 석준은 하얀 면사포 밑으로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탐험가가 오지의 땅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그렇듯 자신이 가는 곳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팽배해지는 낙관적인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왠지 자신의 어깨와 가슴이 더 넓어진 것 같았고 그녀가 기대오는 자신의 팔도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평소 허세와 허울뿐이라고 생각했던 결혼식 행사가 의외로 그 자신에게는 잘 먹혔던 셈이었다. 하지만 그 결혼이 2년 3개월 만에 파탄날 것이며, 그 후 다시 3년 만에 시연이 다른 남자와 재혼할 거라는 사실을 그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그 당시에는 꽤나 자신이 있었는데. 

     이제 내일이 되면 시연은 다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에게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석준에게 했던 것처럼 다른 남자에게 결혼 서약을 하고, 다른 남자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평생을 두고 이루어 갈 수많은 계획들을 - 석준과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계획들을 - 다른 남자와 함께 침대 속에서 다짐할 것이다. 그로서는 그녀를 비웃을 만하지 않은가? 

     석준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겨울 밤, 시연과 했던 섹스가 떠올랐다. 시연은 그날따라 유난히 그를 힘차게 부둥켜안으며 당장 숨이 넘어갈 것처럼 신음 소리를 높였었다. 사실 그에게도 그 날의 섹스는 일생에서 몇 번째로 꼽을 만큼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섹스가 끝난 뒤 시연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면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당신뿐이야.] 

     이제 그녀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같은 얘기를 속삭일 것이다. 

     [나한테는 당신뿐이야.] 

     석준으로서는 정말 그녀를 비웃을 만하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비웃고 있는 건 그녀 쪽인가?

     별안간 석준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혼한 전 부인의 결혼식 전날 밤에 전 남편이 불쑥 전화한다는 건 분명 상식 밖의 일이었지만, 외국 영화에서 종종 그렇듯 그냥 자연스럽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다면 어떨까? 어쩌면 나름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면서 넌지시 자신과 살았던 시절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면 그녀는 뭐라고 할까? 이혼한지 3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과의 결혼생활을 되새기고 있을지 그는 궁금해졌다. 게다가 새로 남편이 될 남자에게 자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는 지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그리고 그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석준을 실제보다 더 형편없는 놈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문득 시연이 자신에게 메일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석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결혼 전에는 물론이고 결혼 후에도 그에게 즐겨 메일을 보냈던 그녀였다. 재혼 소식이며 소감을 메일로 남겼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달려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메일함을 열어 그가 아직 읽지 않은 23개의 메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나같이 스팸 메일들 뿐이었다. [나 지금 꼴려. 오빠 빨리 연락 줘.] [2분 만에 1000만원 대출. 무보증, 무담보. 다시없는 기회, 지금 신청하세요.] [획기적인 영어 학습 프로그램. You can do it!!!] 그는 자신의 꼴이 얼마나 우스운가를 깨닫고 입술을 찡그렸다. 시연이 자신에게 메일을 보냈을 리 없다는 건 누구보다 석준이 잘 알고 있었다. 이혼하고 근 3년간 철저하게 연락을 끊었던 그녀였다. 그녀가 정말 메일을 보냈다면 오히려 그는 영문을 몰라 고민스럽고 불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은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이것은 반칙이 아닌가? 이혼한지 고작 3년 만에, 그것도 3월의 화창한 봄날에, 그에게 말 한마디 없이 결혼을 한다니. 설사 자신이 진 건 아닐지라도 그녀가 철저하게 이겼다는 사실만큼은 공식적으로 온 세상에 표명된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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