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소소한 행복, 아프리카 보츠와나)
뜰 옆 작은 밭에는 얼마 전부터 방울토마토가 붉게 익어갔다. 봄에 몇 포기 심은 토마토가 가지를 불리더니 어느새 옹알옹알 열매를 맺고, 그새 붉은색으로 색칠을 해 놓았다. 지나다 한 개를 따서 소매에 쓱쓱 문질러 먹는 맛은 여느 상점에서 구입한 토마토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신선함과 달콤함이 정당히 묻어 있어 입안에 맴도는 그 맛은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맛이다.
하지만, 아내는 그 붉게 익은 토마토를 성큼성큼 따 먹지 않는 눈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일모레면 수원에서 손녀딸이 오기 때문이다. 손녀가 오면 그 토마토를 따 먹으며 좋아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일주일에 한 번만 학교엘 가야 해서 매일 집에 있어야 한단다. 가끔은 주말을 보내기 위해 시골집을 찾는다. 언제나 엄마와 붙어사는 손녀는 입맛이 참, 어른스럽기도 하다.
손녀딸은 어려서부터 맛보다는 식감을 중시하는 미식가로, 야들야들한 고사리를 특히 좋아하고 그 식감과 비슷한 미역줄기 무친 것을 엄청 좋아한다. 대신, 소시지나 어묵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식감이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라 하면 늘, '괜찮아요!'를 연발하며 극구 사양한다.
이런 손녀를 생각하며 아내와 함께 시작한 것이 고사리 꺾기였다. 산골마을로 이사를 온 지가 2년 정도 되었는데, 시골집을 중심으로 뒤편으로는 산이 가득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갖가지 먹거리를 주는데, 봄이면 홑잎나물부터 취나물과 고사리를 비롯해 두릅 등 많은 것을 내어 준다. 아내와 함께 주목하는 것은 손녀가 좋아하는 고사리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슬을 털며 산으로 올라 고사리를 꺾는 것은 자식의 자식인 손녀가 좋아하기에 힘든 줄도 모르고 오르내린다.
오래전부터 가까이 해온 친구가 있다. 얼마나 강직했는지 조금이라도 옳지 않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친구이다. 언제나 주장이 곧고 어떤 불의에도 타협이 없이 주장이 강한 친구이다. 어느 날 예식장에서 만나 같이 식사를 하는 중에 친구의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는 전화를 받더니 집에 가봐야 한다면서 서둘러 일어난다. 이유는 손자 자전거가 고장 나서 울고 있기 때문에 빨리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둘러 자리를 뜨는 친구를 향해, 옛날의 네가 아니라고 큰소리쳤지만 그도 자식의 자식에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뒤뜰의 작은 밭에는 봄에 심어 놓은 감자가 넉넉하게 자랐다. 하지가 지나 감자를 캘 때가 되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이유가 있다. 집 앞 잔디밭 가에 심어 놓은 블루베리를 산까치들로부터 아내가 그렇게 보호하는 이유도 똑같다. 손녀딸이 찾아와 감자를 캐고, 블루베리를 따 먹으며 좋아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무던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자식의 자식에 대해 그리도 환장하도록(?) 좋아하는 것일까?
부모라면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그들이 귀하면서도 귀여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혹시나 다칠세라 아니면 누구와 다툴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나라도 더 먹여주고, 보여주고 싶어 돈을 벌려고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그렇게 귀중했던 우리의 아이보다, 자식의 자식이 더 애틋하고 귀여운 것은 왜 일까?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여러 친구 중에도 아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다. 하지만 자식의 자식 얼굴을 카톡에 올려놓고 입을 헤하고 벌리며 좋아한다. 아침, 저녁으로 영상통화를 한단다. 네 자식도 그렇게 했느냐 물으면 대답이 없다. 한 친구는 아들 집 옆에 원룸을 얻어 놓고 자식의 자식을 돌봐주면서도 언제나 즐거워한다. 어떤 친구는 매주 서울에 사는 손자를 봐주러 갔다가 다시 친구를 만나러 밤중에 내려오면서도 즐거워한다.
왜 그럴까? 왜 자식의 자식이 그리도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리하지 못했던 나의 비겁한 이유는, 그들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듯하다. 우선은 사회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해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대부분 바닥부터 시작했으니 재정적인 여유도 없었다.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기에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기에 아이들을 자식의 자식처럼 애잔하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적, 재정적 여유가 생기면서 자식의 자식들을 볼 수 있다는 좀, 비겁한 이유를 들어본다.
또 한 가지는 세월의 흐름 속에 자식의 자식을 만날 즈음이 되면, 모가 나던 모서리가 세파에 시달리면서 어느 정도 둥그렇게 변했을 것이다. 웬만한 것은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원만해진 나이에 이르러 자식의 자식을 만나는 것도 이유일지 모르겠다. 만일 내 자식이 잘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고쳐주려고 혼을 내기도 했지만, 자식의 자식들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귀엽기도 하지만 자식의 자식을 혼내 주면 자식들의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자식들이 알아서 가르치겠지라는 핑계 아닌 핑계로 못 본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자식의 자식들은 다 귀여워한다. 전화기의 화면이 그렇고, 만나면 하는 이야기도 그러하며, 일상에서 대부분이 그 일로 채워져 간다. 여지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지며 지갑이 저절로 열어진다. 오늘 아침도 손녀와 영상통화를 하고 싶지만 망설인다. 그 이유는 자식들이 바쁜 시간에 주책없이 전화를 했나 하는 눈치를 살피느라 선뜻 내키지 않는다.
사람의 사는 것이 그런 것이려니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다시금 생각해 보고 싶은 것도 있다. 자식의 자식에게 쏟아내는 정성이 자식에게 쏟아내는 정성이니 아낄 것은 없지만, 나만의 생활도 중요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도 가끔 떠오른다. 전화기 화면에 자식의 자식 사진이 얼마나 귀엽고도 좋은가? 그들을 돌보는 것이 나의 생활일 수도 있지만, 가끔은 내가 살아가는 모습도 비추어 보면 어떨까? 자식의 자식을 바라보는 여유를 나에게도 조금이라도 쏟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도 자식의 자식들을 귀엽고 사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나도 어느덧 할아버지 속으로 빠졌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