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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Dec 07. 2021

골짜기 전원에도 초겨울이 찾아왔다.

(겨울 아침의 소회, 봄을 준비하는 보리)

하얗게 서리가 내린 골짜기, 가을을 지나면서 홀쭉해진 낙엽송 사이로 햇살이 찾아왔다. 하얀 서리를 이고 서 있는 낙엽송이 겨울임을 알려주는 골짜기다. 새벽이면 살아있음을 알려주었던 닭들도 오늘따라 조용하고, 산새들도 흔적이 없다. 가을이 서서히 자취를 감춘 자리에 겨울이 냉큼 들어서고 말았다. 눈은 오지 않았지만 하얀 서리가 잔디밭에도 가득히 내려왔다. 잔디밭에 들어서자 상큼한 소리 사각사각, 서리발이 부서지는 소리이다. 누런 잔디에 내린 서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오래 전의 기억을 되살려 준다.


구비구비 구부러진 텃논에 하얀 서리가 내렸다. 벼를 베고 남은 논자리에 하얀 서리가 내린 것이다. 벼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에도 하얀 서리가 내렸다. 군데군데 웅덩이엔 살얼음이 얼어 조심스러운 논이었다.  휑한 논을 걸어가는 기분, 사각사각 들리는 경쾌한 소리는 추위와는 또 다른 상큼함을 전해 주었다. '아! 겨울이 왔구나!'라는 소식을 전해주던 앞 논의 풍경이었다. 뜰앞의 논에서 만났던 경쾌한 소리를 골짜기 삶의 주택에서 그 소리를 찾은 것이다. 조심스레 걸어가는 잔디밭, 봄부터 가을을 지나 겨울까지 정겨움을 주던 소중한 밭이었다. 일 년간 잡초와 씨름을 하고 덤으로 얻은 푸름이 가슴까지 가득했었다. 

서리가 내린 반송과 소나무

잔디밭 가장자리엔 아직도 많은 식구들이 있다. 자그마한 반송(盤松)이 시골집을 지켜주고 있다.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쟁반을 닮았다 하여 반송이라 불리는 소나무다. 소나무는 외줄기가 올라와 자라지만 반송은 밑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몸을 불린다. 여러 줄기가 올라온 반송이 다복한 모습으로 하얀 서리를 이고 있다. 산을 넘은 햇살이 찾아오면 서서히 흰 서리를 털어내고 푸르른 잎을 드러낼 것이다. 잔디 가장자리에 네 구루의 반송이 둥그스름한 모양으로 시골집을 지키고 있다. 시골집의 상징인 소나무도 우두커니 초겨울을 맞이했다.


잔디밭을 바라보며 호령하듯 서 있는 소나무다. 푸름을 자랑하던 소나무도 하얀 서리를 피할 수 없었나 보다. 일 년 내내 시골집을 지켜준 소나무와 반송, 언제나 푸름으로 편안함을 주고 시골집의 품위를 높여준 나무들이다. 가능하면 자연 그대로 살아가길 원했던 나무들이지만 인간의 욕심이 또 발동했다. 화단 가장자리에 틈만 보이면 나무를 심었다. 하나씩 심다 보니 나무들을 정리해 주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할 수 없이 이사를 온 해엔 정원사를 초빙해 나무를 정리해 주기도 했다.

겨울이 물든 공작단풍과 앞 산 풍경

초빙 정원사, 자그마한 정원이니 손수 해 보란다. 공부하면 쉽다는 말에 머리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는 것은 쉬울 수가 있던가? 가끔 찾아가는 화원에서 묻고, 쉼 없는 공부 하면서 준비를 했다. 나무의 특징과 생김새를 봐가면서 가을이 짙어 갈 무렵에 손수 전정 작업을 해 주었다. 어렵게 전정 작업을 하고 겨울을 맞게 했다. 서툴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정원이 홀가분해졌다. 곳곳에 자리 잡은 반송이 그럴듯하게 보였고, 우뚝 솟은 소나무도 의젓해 보였다. 아직 손을 보지 않은 식구들도 있다. 지난해 심어 놓은 구절초다.


가을을 빛내 주었던 구절초, 겨울을 맞이하느라 녹초가 된 구절초다. 잎이 말랐고 줄기도 힘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것마저 없으면 정원이 허전할 것 같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잔디밭 가장자리를 가득히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절한 골짜기의 겨울을 치열하다. 냉혹한 겨울을 준비하느라 힘이 든 정원 식구들, 몇 해 전에 심어 놓은 십여 그루의 측백나무도 움직임이 없다. 아직은 자라는 중이라 그대로 두고 있지만 내년 정도이면 날씬한 식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골짜기의 겨울은 치열해 사계절 쉼이 없는 도랑에도 초겨울은 찾았다.

잔디에도 하얀 서리가 왔다.

봄철의 졸졸거림이 여름으로 접어들어 콸콸거림으로 한을 풀었다. 서서히 가을 되어 몸집을 줄이더니 갈갈대는 소리로 목청을 낮추었다. 서서히 초겨울로 접어들 즈음에 쇠약해질 듯한 목소리는 어림없다는 듯이 낭랑해졌다. 경쾌한 소리로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초겨울이 왔음에도 가는 길을 멈출 수 없다는 고집이었다. 옹알대던 도랑을 하얀 얼음으로 덮어 씌운 겨울, 작은 도랑은 오늘도 거침없이 반항을 한다. 맑은 얼음 밑을 헤집으며 가던 길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맑은 얼음 밑의 몸짓은 변함이 없고, 낭랑함은 끊임이 없다. 올 테면 와보라는 겨울맞이에 골짜기 겨울도 손 들고 말았다.


겨울이 더 깊어지면 골짜기는 하얀 세상이 될 것이다. 하얀 눈이 찾아오고 덩달아 산골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푸근한 눈이 내려오면 골짜기에 계절의 흔적을 지워버릴 것이고, 찬 바람이 찾아오고 흰 눈이 흩날리면 대지는 엎드리고 나무는 흐느낀다. 냉혹한 골짜기의 산 겨울이 산 밑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겨울이 왔다는 신호에도 도랑은 그침이 없었다. 도랑물 속엔 대지를 녹여 줄 자신감이 있고, 그 속엔 찾아 올 새봄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 더 깊어지면 도랑물은 말없이 손짓을 할 것이다. 서서히 새 봄 맞을 준비를 위해, 대지를 밀어 올릴 새봄을 불러 겨울을 벗겨내야 하는 도랑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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