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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Yeouul Oct 30. 2022

단골집이 생겼다

통영에서 혼자 살아보기 (네 번째 이야기)

13일 동안 통영의 한 숙소에서만 지내다 보니 단골집이 생겼다. 내가 통영에서 지낸 곳은 통영시 산양읍이다. 바다가 바로 옆에 있으며 동네엔 작은 구멍가게 하나만 있을 뿐 아주 한적한 동네이다. 학교와 상가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인도가 없는 도로를 3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하면 숙소에 있는 공동 부엌에서 간단하게 해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통영까지 왔는데 서울에서 가져온 라면과 간편 식품만 먹다 갈 순 없었다. 숙소 근처 식당을 찾아보니 도보 15분 거리에 식당이 하나 있었다.



식당 이름은 '산양 장어 추어탕'이다. 이때 당시엔 숙소에서 식당까지 걸어가는 길이 조금 위험했다. 도로만 있는 길에 인도를 만들고 있어서 찻길과 공사 중인 곳을 피해서 조심히 다녀야 했다. 차만 쌩쌩 지나가는 텅 빈 도로를 15분 걸어가면 식당이 나온다. 식당 앞에는 크게 주차장이 있고 옆에 편의점이 있다. 그리고 아침 식사라고 아주 크게 건물에 붙어 있다. 아침 일찍 일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아침을 제공하는 식당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비교적 이른 점심시간에 방문했다.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식당을 보니 아직 문을 안 열었나 싶어서 사장님께 식사가 되냐고 여쭤봤다. 다행히 식사가 된다고 했고 나는 푸른 경치가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식당 메뉴는 굉장히 간단하다. 장어 추어탕, 황태탕, 해물 미역국 단 세 개의 메뉴만이 있다. 식당 이름이 산양 장어 추어탕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여 나는 망설임 없이 장어 추어탕을 주문했다.







이곳은 반찬이 셀프이다. 여러 가지 반찬이 반찬통에 뷔페처럼 놓여 있다. 먹을 만큼 접시에 담아 가면 된다. 반찬을 담고 자리 앉으니 바로 장어 추어탕이 나왔다. 처음 먹어보는 장어 추어탕이라 맛이 궁금했다. 추어탕에 넣어 먹는 다진 고추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 통이 함께 나왔다. 통에 들어 있는 회색빛 가루는 후추와 몹시 흡사해 보였다. 그래서 의심의 여지없이 장어 추어탕에 마구 뿌렸다. 매운 것을 좋아하기에 다진 고추도 다 넣었다.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는데 뭔가 아찔한 맛이 느껴졌다. 내가 넣은 게 후추가 아니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가루 통의 정체는 방아 가루였다.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맛이었다. 뭔가 톡 쏘고 강한 향이 느껴지는 방아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방아 향이 스며든 국물을 먹으니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처음 맛보는 방아로 잠시 아찔했지만, 먹다 보니 점점 익숙해졌다. 반찬도 입에 잘 맞았다. 점심시간이 되니 어느새 식당은 사람들로 꽉 찼다. 자리가 없어 합석하는 테이블도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문 앞에 식혜가 있어서 입안에 감도는 방아 향을 식혜로 개운하게 없애줬다.



이날 이후 나는 2~3일에 한 번씩은 이 식당에 방문하여 여기에 있는 모든 메뉴를 먹어 보았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반찬도 좋았다.




여행에서 생긴 소소한 추억과 만남, 우연, 행운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 녹아 있고 작고 소중하게 감정 어딘가에 파고들어 있다. 이 감정이 한데 모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1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나름 단골집이 생긴 셈이다. 단골이 주는 의미는 상당히 특별하게 다가온다. 초등학교 앞 분식점, 대학교 앞 식당, 학원 근처 카페, 동네 술집 등 나의 일상에서 습관처럼 자주 방문하는 곳을 우리는 단골집이라고 말한다.



이번 통영은 다소 긴 기간이어서 그런지 단골집이 주는 안정감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위안으로 다가왔다. 뭐 먹을지 고민할 땐 그냥 그 식당으로 향했다. 달리 할 게 없는 날 숙소에서만 시간을 보내다가 식당에 가서 밥이라도 먹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몇 번 방문한 거로 단골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좀 억지일 수 있겠지만 여행에서 여러 번 방문한 곳이 있다면 그곳이 주는 의미와 안정감은 다르게 다가온다. 지난 여행을 떠올려보자. 짧은 여행이라 할지라도 거의 매일 들른 카페, 맛있어서 몇 번 방문한 식당은 나의 기억과 기분을 더 또렷하게 떠올려 준다. 그리고 여행 중 이런 곳을 발견한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우연히 마주치는 이런 행운은 우리의 추억을 더 따뜻하게 해 준다.



여행에서 생긴 소소한 추억과 만남, 우연, 행운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 녹아 있고 작고 소중하게 감정 어딘가에 파고들어 있다. 이 감정이 한데 모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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