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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선생 May 10. 2020

저항의 봄에 詩를 떠올리다

[음악에세이#04]우테 렘퍼(Ute Lemper)의 <Forever>



  나의 영웅 체 게바라가 죽음을 맞던 1967109, 그의 배낭에는 손때 묻은 지도와 두 권의 비망록 그리고 한 권의 녹색 노트가 들어 있었다. 40여 년이 훌 지나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녹색 노트의 내용은 공개되자마자 모두를 의아하게 들었. 그곳에 게릴라전의 전술도, 체 게바라의 유언도 아닌 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녹색 노트 안에는 세사르 바예호, 레온 펠리페, 니콜라스 기옌, 그리고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들이 필사되어 있었다.



  나의 20대는 실로 詩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가득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윤동주와 천상병의 시집 정도를 정독한 기억이 있을 뿐, 그 시절의 나는 스스로가 문학사(文學士)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詩를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시는 산문(Prosa)에 대립”한다는 헤겔의 말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詩에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詩라는 문학 양식에 대립적 입장을 취하 이들 중의 하나였. 20대 내내 소설과 수필 등 산문만 탐했고, 때로는 산문의 충실한 홍위병이라도 된 양 詩를 배척하길 서슴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내게 시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해 준 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다. 다시 헤겔의 말을 빌자면, 파블로 네루다는 내게 왜 “詩가 예술의 최고위”에 있는지를 알게 한 첫 번째 시인이었다.


  사실 詩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 놓은 것은 시집과 같은 인쇄매체가 아닌 영상매체였다. 체 게바라가 사랑했던, 이 위대한 칠레의 민중 시인을 처음 만나게 된 이유가 다름 아닌 영화 <일 포스티노>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이창동 감독의 <시>와 더불어, 내게 ‘詩란 무엇이며, 왜 읽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준 영화다. 네루다를 만나 변해가는 주인공 마리오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시의 가치와 의미를 깨달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야말로 명작 중의 명작이다. 특히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경험해 보는 거야 영화 속 네루다의 대사는, 내게 전쟁의 포화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민중을 위한 저항시를 필사했던 체 게바라의 심정을 가늠케 했던 명대사로 기억된다. 파블로 네루다는 ‘詩라는 위대한 예술의 가치’를 내게 알려준 예술가였고, 내 영웅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었다.


영화 <일포스티노>. 내게는 시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해 준 고마운 명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우테 렘퍼(Ute Lemper) 아티스트가 고마운 이유는 그때문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곡을 붙인 <Forever>라는 음반을 발매하는, 특별한 일을 기꺼이 해주었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의 뮤지컬 배우이자 무용가이며 가수이기도 한 그녀는,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뮤즈(Muse)’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아티스트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50세 생일에 맞춰 발매한 <Forever> 앨범은 생동이 넘실거리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들을 그녀 특유의 넘치는 에너지와 음악성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그녀를 상징하는 카바레 뮤직과 재즈, 중남미 특유의 음악까지 넘나들며 다채롭고 풍부한 사운드로 가득 채워진, (비록 우리나라에 크게 알려지지 못했지만) 흙 속의 진주와 같은 음반이다.


다재다능한 아티스트 우테 렘퍼(Ute Lemper)의 <Foever> 음반 커버. 네루다의 서정시 12편을 가사를 그녀 특유의 음악성으로 해석했다.


  예기치 못한 전염병으로 봄의 생기조차 만끽할 수 없는 이 힘든 시간에, 파블로 네루다의 시와 우테 렘퍼의 노래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생동감 넘치는 네루다의 詩 12편과 그에 진하게 녹아든 그녀 특유의 폭발적인 음악성을 통해, 우리 모두가 이 힘든 시기를 이겨 낼 수 있도록 약동하는 에너지를 얻길 바랐던 것이리라. 그 대상이 무엇든, 우리를 핍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해야 할 봄을 맞았기 때문이리라.  또한 그녀의 음악과 함께 힘껏 저항해 가려 한다.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 대륙을 휩쓰는 역병이든, 부조리한 권력이든.


# 추천 Playlist

- 체 게바라가 필사했던 네루다의 시, The Saddest Poem / No.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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