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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두강이로
19화
이 구역 패셔니스타는 나야 나!
제19화. 크롭티 입은 두강
by
도희
Jan 31. 2023
에취! 찬 공기가 콧구멍 안으로 훅 들어온다. 오늘따라 찬바람에 뼈가 시리다. 감기 걸리기 딱인 날씨다.
게다가 털까지 밀었으니 더 춥다.
옷이 필요하다.
엄마가 형광 연두색이 있는 조끼를 입혀 주었다.
내가 인명구조견도 아니고,
환경 미화견도 아닌데 옷 꼴 하고는.
하긴 엄마 옷 입고 다니는 것만 봐도 촌스럽긴 하지.
가만있다가는 평생 엄마가 입혀 주는 옷만 주구장창 입을 것 같아 나도 취향 있는 개임을 밝히기로 했다.
인명 구조견 같은 두강
어떤 방법을 쓸까 저녁 내내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옷을 벗어던지기로 했다.
다행히 옷이 좀 커서 목을 가볍게 비틀어 지퍼를 물어뜯으니 가슴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가슴 한쪽이 드러나 은근 섹시하긴 하지만 만족하지 않고 내친김에 세게 몸부림 쳐본다.
오호, 한방에 훌러덩 하고 벗겨진다.
등이 좀 썰렁하지만 이 정도는 참아야
내 취향이 아님을 확실히 나타낼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아빠가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다른 옷을 가지러 간다.
새 옷을 기대한 나는 폭망이다. 봄에 입었던 조끼다.
그것도 어제 입었던 조끼와 색깔 사이즈만 다른 옷. 차라리 어제 옷이 그나마 낫다.
새 거니까.
‘오늘 밤 이 옷을 그냥 두지 않겠어.’
아빠에게 나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맙다는 듯이 냉큼 조끼를 걸쳤다.
소방대원 같은 두강
저녁밥을 주고 난 후 아빠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어둠 속에서 내 눈은 야생동물의 그것이다.
슬슬 시작해 볼까? 시간은 내편이다.
어제 와는 다르게 내 몸에 딱 맞는 옷이라 쉽지가 않다.
몸을 마구 흔드니 헐거워진 지퍼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그렇지 더욱 세차게 흔들어 흔들어.
거의 다 왔어.
성공이다. 이번엔 아주 아작을 내놔야지.
조끼를 벗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에 퉤퉤, 솜이 입안에 들어왔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맛을 기대했는데
아무 맛도 없다.
머리와 몸을 동시에 썼더니 급 피곤하다. 에너지 드링크 한 병 마셨으면 딱 좋겠는데~
난 승리감에 도취되어 개선장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 아빠 표정이 기대된다. ㅋㅋ
다음 날 아침 내 꼴을 보고 아빠는 한숨부터
내 쉰다.
아싸! 이번에 새 옷이겠지.
웬걸, 아빠는 뒷덜미가 다 찢어진 누더기 같은 옷을 그대로 다시 입힌다.
설마 옷이 없는 건가?
아! 새 옷이 있는 걸 확인하고 작전에 옮겼어야 했는데 성급했다. 완전 작전 실패다.
그나저나 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 갠데 이 꼴로 산책을 나갈 수도 없고 어떡하지
엄마 닮아 급한 성질 머리를 탓하고 있는데 호랑이 제말 하면 온다는 그 호랑이 말고 엄마다.
엄마 손에 들려 있는 시커먼 저것은 무엇?
엄마는 예의 그 징그러운 미소를 띠며
등 뒤로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내 옷을 벗기고 손에 들고 있던 옷을 입혔다.
이게 뭐야? 목을 집어넣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럴 땐 엄마 힘도 제법이다.
엄마가 말했다.
“야, 더 이상 네 옷 살 돈 없어, 그래서 엄마 옷으로 네 티셔츠 만들었지롱.
이 옷 만드느라 무려 2시간이나 걸렸다 이놈아."
“역시 우리 두강인 검은색이 잘 어울리네. 시크한 도시애 같아”
‘아, 뭐래. 이게 옷이야?’
졸지에 누더기견이 돼 버렸다.
엄마의 쫄티로 만든 옷을 입은 비루한 나.
비루한 두강
망했어. 난 오늘부터 털 자랄 때까지
산책 나가지 않을래.
이월이나 초코가 이 꼴을 보면 뭐라고 놀릴까. 생각만 해도 귀가 빨개진다.
오후 산책 시간이 되었지만 의욕이 없다.
산책 갈 준비도 안 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아빠는 내 꼴이 딱한 모양이다.
서랍을 뒤적여 새 옷을 찾아냈다.
짙은 남색에 빨강과 흰색의 줄무늬가 있는 옷이다
날씬하게 보이는 데다 세련된 색감. 저거다. 득템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아빠가 옷을 들어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무래도 작아서 안 되겠네”
'
안돼. 저 그 옷 입을래요.
'
아빠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요즘 크롭티(배꼽이 보일 정도로 아래의 길이가 짧은 티셔츠)가 유행이라구요.
나 그거 입을래요.
나 유행에 민감한 개란 말이에요.
난 드디어 진정한 패셔니스트가 되었다.
패셔니스트 두강
물고 뜯고 맛본 흔적
수선 맛집 두강네
멀쩡한 옷이 없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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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셔니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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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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