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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Nov 23. 2020

인간 소화제

까스활민구

"여보 지금 가서 쓰고 싶은 글 좀 써"

"아, 지금.. 손에 힘이 없어서"


작가의 서랍에 넣어놓은 주제들이 10개도 넘어가고 있지만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오늘 장모님께서 오셔서 여유도 생기고 글을 쓸 시간도 생겼다. 글 쓰고 싶다고 끌탕을 하는 나를 기억하던 아내는 나에게 글을 쓰라며 여유를 누릴 호사를 허락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아내는 입덧이 심하다.

아내는 하루 종일 인상을 쓰고 누워있다.

자는 시간에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을 호소한다.


입덧은 안 겪어봤지만 숙취는 겪어본 나에게, 아내는 입덧이 숙취와 비슷한 상태라고 말한다.

머리 아프고 속 쓰리고 울렁거리고 온몸에 힘이 없다고 한다. 이해가 되었다.


입덧이 심한 아내가 안쓰러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를 연일 물어보고 백종원 선생님의 유튜브를 보며 인생 최대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행히 어제 만든 깍두기가 합격점을 받아 아내는 오늘 점심에 깍두기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아내가 아무것도 못 먹어도 문제지만, 뭔가 잘 먹어도 고민이다. 먹은 다음에는 소화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호르몬의 영향인지 장운동이 제대로 되지도, 소화가 자동으로 이뤄지지도 않는다.


나는 아내의 손 발을 주무른다. 다리를 주무르고 등과 허리 복무를 마사지한다. 그렇게 열심히 주무르다 보면 아내 뱃속에서 '꾸르르륵' 소리가 난다. 뭔가 음식물이 다음 장기로 이동하는 소리가 확실하다.


몸속에서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심지어 지금 아내 뱃속에는 쌍둥이가!!)라는 생각을 하는 나는 아내가 깨어있을 때는 물론이고 자기 전과 자는 도중에도 나는 그녀의 소화제가 되어 여기저기 주무르고 마사지한다.


특히 자기 전이나 자는 도중 아내를 마사지하면 아내는 배에서 '꾸르륵' 소리를 몇 차례 낸 이후에 깊은 잠에 빠진다. 새근새근 코를 골기도 하고 아주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그러기를 벌써 한 달여, 내 손과 팔에 알이 배었다.


오늘 아침에는 빵을 먹는데 빵을 찢어 입으로 가져가려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마치 격렬한 근력운동을 한 직후와 같았다. 평소 아귀힘과 팔힘이라면 나름 자신이 있는 편이었는데, 뭔가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입덧의 끝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임신-출산-육아는 모든 것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기 때문에 단 한 가지도 쉽게 예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얼른 Manual digestion mode에서 Automatic digestion mode로 변경되었으면 좋겠다.


"여보 나 그제 사 온 와인 한 병 하고 잘게"


아내가 나의 노고를 치하하며 시간을 허락해주었다. 발 마사지만으로 오늘 취침 전 마사지는 종료되었고, 일요일 저녁 11:30 아내가 잠듦으로써 육퇴(육아 퇴근)에 이은 가퇴(가사업무 퇴근), 그리고 아퇴(아내 돌봄 퇴근)이 끝이 났다.


여전히 손에 힘이 없다. 와인의 코르크를 따는데 손이 후들후들거렸다. 결국 질척 질척 코로크를 따다가 코르크가 중간에 끊어져버렸고, 두 번에 걸쳐 와인을 개봉했다.


와인을 한 잔 걸치고, 코로나 2단계에서는 뭘 하면 안 되는지 검색한 후, 브런치를 켰다.


쓰려고 작가의 서랍에 넣어둔 글감들은 많지만 오늘은 아내의 소화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가스 활 민구에 대해서 쓰고 마무리한다.


아- 드디어 출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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