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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쑥개떡

개떡 같은 아들

by 아빠 민구

혼자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걱정되셨는지, 엄마는 백신 후유증을 달고 대전으로 내려오셨다. 내려오셔서도 압이 오르내렸고 두통이 뒤를 이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출근하면서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퇴근하면서 아이들을 하원 시키고, 밥 먹이고 빨래하고 목욕시키고 청소하면서 짬짬이 신생아들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은 어려웠다.


오시지 말라고 말씀은 드렸으나, 엄마가 오시니 훨씬 수월했다.


집에 도착한 엄마는 대뜸 쑥개떡부터 꺼냈다. 특별할 건 없었다. 35년을 보아왔던 못생기게 동그랗고 짙은 초록색의 떡이었다.


엄마는 올봄에 쑥을 뜯어 개떡을 해주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으나 몸도 아프고 대전에 내려오기가 힘들어 이제야 개떡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나는 조금 있다가 먹겠다고 했다. 찐 옥수수 네 개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속이 더부룩했다.


엄마는 쑥개떡을 풀어놓으며 말씀하셨다.

"쭈그리고 앉아서 쑥 뜯으면 무릎이 얼마나 아픈데- 내가 올봄에 너 개떡 해주려고 쑥 뜯어놓고, 오늘 급하게 내려온다고 어제 잠도 못 자고 떡 만들어왔다."


아프다는 소리가 지겨웠던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엄마. 떡 해오신 건 고마운데, 아프다고 말씀하실 거면 떡 해오지 마세요. 떡 안 먹고 엄마 아프다는 소리 안 듣는 게 나아요"


말을 뱉어놓고서도 스스로 싸가지 없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뱉은 말은 쏟은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주워 담기가 어려웠다.


분위기는 어색해졌고, 엄마와 나 사이에 쑥개떡만 바보같이 앉아있었다. 바보같이 생긴 쑥개떡이 나에게 "뭐해 바보야, 한 입 베어 물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배는 불렀지만 쑥개떡을 하나 집어 들었다. 30년째 엄마 집에 있는 헌 개나리 이불, 낡은 수저 같은 익숙한 맛이었다. 30년 전통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불허전, 멈출 수 없는 그 향긋하고 달콤 씁쓸-한 맛에 몇 개를 더 집어 먹었다.


봄이면 먹는 게 쑥개떡이었다. 어렸을 땐 연례행사로 들에 나가 엄마랑 쑥을 뜯었다. 좀 커서는 '뭐 밖에서 풀까지 뜯어다 떡을 해 먹나'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같이 쑥을 뜯으러 가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봄이면 늘 쑥을 뜯어 개떡을 만들어주셨다. 봄이면 언제나 들판 어디에서나 쑥이 올라오는 것처럼, 들을 향한 엄마의 마음은 언제나 쑥처럼 올라오는 것이겠지.


육사에 입학하고 엄마가 면회를 오셨을 때에도, 고성이며 장성이며 전국으로 부대를 옮겨 다닐 때도 엄마는 늘 매년 봄에 뜯은 쑥으로 떡을 만들어오셨다.


아내가 조리원에서 돌아오기 전, 매일 같이 새벽 세네시까지 신생아들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나와, 무릎이 아프고 백신 후유증에 머리가 핑핑 돌아도 쑥개떡과 반찬을 가득 챙겨 버스를 타고 온 엄마의 마음이 같네.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나는 부른 배에 개떡을 몇 개 더 집어넣고 숨을 할딱거리고 있었다. 개떡 같은 아들의 막말에도, 엄마는 계속해서 쑥개떡을 먹으라 권한다.


애가 넷인데 아직도 나는 어린가 보다. 특히 엄마에 대해서는 더 철이 없고 서툴다. 엄마만큼 커야 또 지금의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겠지. 그만큼 엄마는 더 늙어계실 테고. 아- 정말 개떡 같은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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