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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생에 끼여 넣기로 한 것들

비건, 요가, 여행 그리고 농사까지

by 유하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

이 생각의 시작은 어이없게도, 내가 받은 악플 하나 때문이었다.

나는 비건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꾸준히 영상을 만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정말 잘했어요!”라는 칭찬을 듣기 위해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거센 반응들이 따라왔다. 외모에 대한 조롱, 가족에 대한 모욕, 거친 말투 속에 묻힌 혐오들. 처음에는 그 말들에 상처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찔렀던 감정들은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었다. 그들 안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만 쌓인 이유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봤다. 아마도 주변에 자신을 사랑으로 보살펴주는 사람들이 부재한 것이겠지. 그러니 내면에 분노와 질투가 쌓여 그것들이 흘러넘쳐 버린 것이다. 악플이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까 그 말들이 아프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 주변에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 그들이 괜찮아졌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때로는 공격적인 말투 속에도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니가 농사 지어봐라! 네 입에 들어가는 것 중에 생명 안 죽이는 거 하나도 없어. 그렇게 다 불쌍하면 풀도 먹지 마!"

처음엔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벌레들이 죽는 건 농약 때문 아니야? 유기농 먹으면 되잖아.’ 그래서 나는 악플 읽기 영상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저 진짜 농사 너~~ 무 지어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지어볼게요~"


그렇게 시작된 나의 농사 여정. 그리고 곧 깨달았다. 그 사람이 한 말, 허튼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내가 농사를 배우고 있던 곳은 한국에서도 드물게 유기농법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생명을 죽이고 있었다. 호미로 김을 매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지렁이를 베어버렸고, 어떤 날은 고춧잎을 갉아먹는 노린재를 플라스틱 통에 담아 두고 ‘자연사’하게 하는 작업으로 반나절을 꼬박 보냈다. 처음에는 나비를 삽으로 인정사정없이 죽여버리는 동료에게 쓴소리를 했지만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십자화과 식물에 나비가 알을 낳으면 내가 사랑하는 채소들(청경채나 양배추 등)을 먹지 못한다는 것을 배운 후에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됐다. 하루 종일 모내기를 해놓은 논두렁에 구멍을 숭숭 내버리는 드렁허리는 또 얼마나 얄밉던지. 다른 사람들이 맨손으로 그들을 던져버리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꼴좋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더 ‘죽임’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흙의 온기, 잎을 쓸며 지나가는 바람, 햇살에 번지는 이슬 냄새.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조차 매일 나는 누군가를 해치거나 그들의 생을 끝내야 했다.


‘무해하게 살고 싶다.’ 그건 대학 시절부터 내가 품어온 삶의 방향이었다.

예술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발리에서 요가와 서핑하며 사는 삶’을 실현하고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그 언니, J는 학과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구릿빛 피부, 길쭉한 팔다리, 그녀가 만든 과제들까지. 겉모습뿐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에서 나오는 당당함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나는 J 덕분에 비건을, 요가를 시작했다. 그 두 가지가 내 인생에 들어오고 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요가를 꾸준히 수련하며

예전엔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흔한 욕망을 좇았다면, 지금은 ‘무해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이끄는 첫 번째 기준이 되었다.


지금까지 매일 내가 먹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나마 요즘은 내가 농사지은 것만 먹어서 망정이지, 다른 가공품은 얼마나 더 다양한 생명들을 헤치며 내 입속으로 들어왔을까? 나는 벌레를 죽이며 오히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고기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절대적으로 생명을 더 많이 죽이는 일인데 당연히 비건을 하는 편이 생명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편이 더 알맞은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에 농사를 넣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먹기 위해서 무언가를 헤쳐야 한다면, 그 아픔을 외면하는 대신 인디언 부족처럼 먹을 것을 얻을 때마다 사죄와 감사가 섞인 기도를 하며 나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


유기농법으로 지은 농사는 '무해한 삶'을 살고 싶은 나의 기준에서 가장 가까운 삶의 방식이었다. 물론, 완벽하게 무해한 농사는 없다는 것을 이제 안다. 잡초 한 포기를 뽑기 위해 땅속에서 끊긴 뿌리와 미생물을 상상하고, 벌레 먹은 잎을 손으로 따내며 벌레의 생도 함께 떨어뜨리는 기분을 견디는 것. 어떤 작물은 내가 손을 댄 순간부터 운명이 바뀐다. 그리고 그 순간을 인지하게 되면, 내 안에 책임이 생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이 삶을 택했다. 아니, 어쩌면 그걸 알았기 때문에 이 삶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생명과 생명이 맞닿는 찰나의 경계에서, 나도 함께 흔들리고 망설이고 책임지며 살아가는 삶. 내가 저지르는 선택이 땅에 새겨지고, 그것이 곧 내 몸의 감각으로 되돌아오는 세계. 그것이 내가 농사를 계속 짓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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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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