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것으로 가득한 홍동에서의 일상
“유하야, 캠프파이어 갈래?”
린이 불쑥 물어봤을 때 나는 잠시 망설였다. 농사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 하루가 끝나면 몸이 녹초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요일 저녁, 숙소에만 있으면 괜히 무기력해질 게 뻔했다. 고민하는 나를 보며 린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거기 가면 홍동의 게츠비를 만날 수 있어.”
홍동과 게츠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에 호기심이 확 생겼다. 우리는 농사일을 마치자마자 베리의 동생, 썬의 집으로 향했다. 마당에는 밤새 불태워도 남을 만큼 장작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 음식을 꺼내놓고 있었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나는 말문이 막혔지만,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나는 ‘홍동의 게츠비’라 불린 베리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베리는 딸기 농장을 운영하며, 두 달에 한 번 ‘밝맑 도서관’에서 고전 영화와 독립 영화를 상영한다고 했다. 보드게임 모임, 암벽 등반, 캠프파이어 같은 깜짝 파티까지… 마을의 활기를 만드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날 나는 또 한 사람을 만났다. 여자 축구팀 반반 FC의 감독, 웅이었다. “여자 축구팀이 있다고?” 서울에 살 때는 멀리서만 보던 풍경이었는데, 홍동에서는 당장 다음 주부터 참여할 수 있었다. 운동을 늘 해왔던 나에게 이건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그렇게 나는 매주 일요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홍동에는 ‘잎’이라는 네이버 밴드 앱이 있다. 이 마을에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삶의 질을 위해 이 밴드에 가입하는 것은 필수다. 가입한 순간, 도시에서 '귀촌한 낯선이 1'에서 마을 '주민 1'로 사람들에게 각인될 수 있는 기회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때문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정말 많은 모임을 여는데, 그렇기에 새로운 사람을 항상 원한다. 마을 골목을 걸으며 마을 역사를 배우는 모임, 나무 이름을 알아보는 모임, 비폭력 대화 모임, 연극 동아리, 새 탐조 모임… 인구 4000명에 공식 모임만 40개라니. 도시에 사는 사람 못지않은 연결에 대한 열망이 시골 마을에 존재했다.
나는 어느새 ‘잎’에 중독돼 있었다. 카페인도, 술도, 담배도 아닌… 오직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월요일은 라디오 녹음, 화요일은 축구 연습, 수요일은 채식 밥상과 뜸방 봉사, 저녁엔 또 축구. 금요일에는 보드게임, 토요일엔 걷기 모임, 일요일은 축구 경기. 일주일이 모임으로 꽉 찼다. 그 일정 중 어느 하나도 버릴 게 없었고 오히려 마을에 있으면 있을수록 가고 싶은 모임만 늘어날 뿐이었다. 무언가 이렇게 열심히 참여한 것은 중학교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화요일에 하는 축구 연습은 비룡과 기초를 쌓고 테크닉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첫 한 시간은 초등학생들과 같이 체력 훈련을 하고 기본적인 것을 연습했다면 그 뒤 한 시간은 배운 것을 심화하여 트레이닝하고 리프팅(발로 축구공 올리기)을 연습했다.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이미 잘하는 사람들 앞에서 폐를 끼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비룡은 그럴 때마다 격려를 해주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계속하잖아? 그럼 언젠가는 된다니까."
짧은 시간 안에 빠르고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압박, 시작하기도 전에 알게 된 큰 벽은 넘어갈 엄두가 나지 않던 나에게 비룡의 칭찬과 격려는 위로를 주었다.
수요일에 하는 채식 밥상은 비건인 나에게 거의 뷔페나 다름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유기농으로 지은 채소, 그리고 그것들로 직접 만든 요리. 많을 때는 스무 명이 넘게 왔는데 사람마다 하나씩 가져오니, 스무 가지 비건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어르신들이 참여했는데, 한국의 어르신들은 미안해서 두 가지씩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곳에서 나는 깍두기였다. 농사 수업이 끝나고 곧장 채식밥상에 와야 할 때는 음식을 가지고 오지 못했지만, 오히려 모임장인 담은 그런 사람들까지 환영해 주었다. 각자 음식을 소개하는 시간에는 박수까지 쳐주며 '그 대신 많이 먹고 가세요!'라고 말해주어 마음을 한결 편하게 만들어 준다. 채식밥상은 그냥 음식을 가져와서 먹는 자리는 아니었다. 매주 하나의 모임을 소개해주었는데, 덕분에 마을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녹색평론, 여름지이, 홍동 의원 등 내가 알아야 하는 정보나 동네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요리법도 공유하고 농사법도 공유하고 씨앗도 공유하는 만남의 장이랄까.
뜸방은 개인적으로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요가를 시작한 이후로 몸 근육과 혈자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서 침을 놓는 것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침을 사적으로 배워서 놓는 것은 불법이었으므로 뜸 뜨며 혈자리를 배우기로 했다. 그곳에는 한의사 선생님도 한 달에 한 번씩 오셨기 때문에 무언가 제대로 배우는 느낌이었다. 뜸봉사는 마을 사람들이 오면 혈자리를 잡아주고 사람들 손이 안 닿는 곳에 뜸을 떠주는 일이었다. 나는 공부도 할 수 있고 연습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봉사하는 것이 진심으로 좋았고 또 감사했다. 하지만 같이 봉사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고 해주었다.
"젊은 사람이 여기에 와서 이렇게 시간 내어 봉사해 주는데 어떻게 안 고마워요."
아, 이 마을에 살면 이렇다. 내가 이곳에 꼭 필요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밖에 없다. 나에게 한없이 무언가를 알려주고 나눠주며, 내가 그냥 여기 존재해 있음에 감사해 주는 사람들. 청년들에게는 이런 마을이 필요하다.
마을은 각종 행사로도 바빴다. 마지막째 주 토요일은 마을 장날이 있다. 내가 그곳에서 천원에 산 머리 두건은 나한테 찰떡같이 어울렸는지, 내가 그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어디에서 샀냐고 물어보았다. 아, 인플루언서가 이런 느낌이려나? 중고품은 아쉽게도 하나밖에 없어서 어디에서 샀는지 알려줘도 다시 구할 수 없을테지만 그렇기에 더욱 특별했다. 장에서 파는 비건 음식과 쌀 요거트를 사 먹는 것도 재미 중 하나였다.
셋째 주 금요일은 ‘룰루랄라’라는 공연의 날. 매월 주제가 바뀌고 누구나 무대에 올라 노래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난생처음 낯선 사람들 앞에서 4월에 ‘위로’라는 주제로 노래를 불렀다. 맥주 한 모금만 먹어도 곧 잘 취하는 나는 500cc 맥주를 두 컵이나 마시고 취기로 긴장감을 누르며 백예린의 'antifreeze'와 비틀스의 'I will'을 불렀다.
"긴긴 겨울이 드디어 끝나고 봄이 왔네요. 춥디 추운 겨울에 계엄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몸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는데요. 계속해서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주신 분들 덕분에 파면이라는 봄이 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또다시 겨울이 오겠지만 지금처럼 계속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우리를 얼어붙게 할 모든 것을 녹여버립시다."
"[I will]은 이성적인 사랑에 대한 노래라고 느껴질 수 있는데요, 가사를 들여다보시면 너와 함께 있을 때나 멀리 있을 때나 늘 사랑할게 라는 구절이 있어요. 세월호나 43 사건처럼 다양한 비극으로 우리 곁에 없어진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늘 함께 그들을 사랑할 것이고 기억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골랐습니다."
월간 룰루랄라 사상 제일 많은 관객이 있는 날이었다. 내가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농사 일정이 끝나 시간이 날 때마다 우쿠렐레를 연습하며 노래를 불렀던 시간을 용기 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기뻤다. 물론 이곳 마을 사람들은 나의 노래실력을 평가하지 않고 그저 즐겨주기 때문에 나 또한 그곳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다.
3개월쯤 지나자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유하 씨, 홍동에서 3년은 산 사람 같아요.”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처음엔 그저 농사를 배우며 좋은 커뮤니티를 경험하러 왔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다정한 사람들과 배움이 있는 곳에 내가 스며들고 있었다. 이젠 모임 하나하나가 나를 이 마을에 단단히 묶어주고 있었다. 모임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마을이 서로를 엮어내는 방식이자 내가 이곳에 뿌리내리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