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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렌스 Oct 27. 2024

의사 선생님이 봉인하는 기록

무얼 입력하셨나요. 보여주시면 안돼요?


늘 궁금하다. 질문에 답을 하고 잠깐 쉬고

또 울기도 하기 때문에 눈길이 갔었나 싶기도 하지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소파에 앉아 팔걸이에 무선 키보드를 두고 계신 나의 선생님께



선생님 지금 뭐 쓰신거예요? 궁금해요


묻고 싶다 항상.


모든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들이 같진 않겠지만 내가 다니는 병원 선생님께서는 늘 병명에 관해서나 병증 차도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신다.


아마 그래서 예약일이 다가오면 맘이 슬슬 풀어지는 걸까.


때로...

다짐이 무색해지게 후두둑 애먼 순간 눈물이 터지는 나를 가만히 봐 주시며


”물론 지금 많이 힘드시겠지만...

시간은 늘 우리 편이니까요.“


...


나는 어쩐지 그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을 쳐다볼 수가 없었고


지금도 괜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정말 우리 편이든 아니든 진실을 떠나. 뭐, 물론 나는 우울증 환자라서...


후에도 오래 그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반사적으로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냥 그런 형식의 말을 책이 아닌 음성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어왔기 때문일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약 복용이 원활해야 그 다음 단계와 변화가 있는 건데 며칠에 한 번 먹거나 연일 건너 뛰거나 심지어 약을 어디에 뒀는지 잃어버리는 상황에 나도 지쳤을 땐, 진료를 받으러 간 건지 멍을 때리고 앉아 있고 싶어서 왔는지 참 내가 한심스러워 선생님 뒤쪽 창가만 보고 있었다. 많이 밀린 대기 환자에 대한 걱정 말고는 그런데, 딱히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언젠가 오은영 박사님 프로그램에서 솔루션 받던 아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를, 박사님이 ’정신과 선생님 때문이죠.’ 하고 짚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 역시 이사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고 어쩌면 일정이 당겨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아차 싶다.

뭐, 여의치 않다면 예약일 맞춰 병원을 찾아오면 될 일이긴 하지만.



몇 년의 우울증 치료 과정 중 초기, 나는 병원 몇 군데에서 초진과 초진 그리고 초진을 반복했고 약 설명은 길었다. 상담하면서 극단으로 울어제낄 만큼 상태는 중증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술은 안됩니다. 특히 그 말 앞에서 무너지기도 하면서 한숨 푹푹 쉬며 나오면 데스크에서 잡아주는 일정은 아주 가차운 후일. 털어먹고 나면 가슴부터 정수리까지 타고올라가 괴롭히던 벌건 기운이 조금은 나아졌지만 어쩐지 몇 번을 바꾸고 바꿔도 이 치료들이 내게 들어맞는 느낌이 들지 않아 더 불안했다.



지금 병원을 찾은 것은 그냥 가까운 데 한 번 가 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전국 곳곳을 알아보고 가 봤자 반복일 것 같아서. 무슨 마음의 치유까지 기대한 건 아닌지, 병증을 가라앉히는 데만 집중하자 싶었던 거다.


그렇게 쭉 이 병원에서 처방받고 진료받게 됐다. 내가진짜왜이러는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둥, 그냥 다 못하겠다는 둥. 죽고싶다.....이게 아니라 그냥 뭐 죽을까? 무슨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도 죽고싶을 수 있냐는 둥 뭐 그런 소리 앞에서 골똘히 질문을 더하시고 토독토독 키보드를 바삐 움직이신다 선생님은.


언젠가 이 시간들이 다 마무리된다면 혹시나.

혹시나 그런 날이 온다면 그런 기록 뭉치들을 제게 선물로 주실 수도 있을까요 ? 비밀처럼 모아지고 아무나 볼 수는 없는 나에 대한 기록들이 궁금하다. 지난 번에 ____라고 말씀하셨고 굉장히 힘들어하셨죠. 좀 어떻게 지내셨나요


성실하고 거울처럼 미끄러운 기록들. 진료실 환자 소파에 앉으면 고요한 나무책장과 오래된 책들이 가지런한 손과 손과 팔과 팔들로 내 등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것 같다. 어둡고 든든한 그 풍경은 진료를 마치고 돌아서며 다시 한 번 마주친다. 선생님께 인사하고 그들에게도 인사한다. 한결 가벼워지는 마음.


어려운 질문들 속에서 나는 단순한 약속 하나 마무리하지 못하면서 한결 더 삶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산다.


오늘은 네, 지금 모습만 봐도 괜찮으시네요.


지난 번 내 질문에 해주신 답. 웃음.

내 등 뒤로 무엇을 입력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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