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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02. 2024

2 호감 가는 상대를 바라볼 때 동공이 커진다

예주의 의도적 접근과 상담의 시작

벚나무와 라일락이 조금은 성급하게 꽃망울을 틔웠다. 그야말로 봄이다. 상담심리학 수업을 마치고 내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에 발길을 멈추고 잠시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내가 학부생이던 시절에는 캠퍼스 내 꽃들도 순서를 잘 지켜 차례대로 피고 졌다. 요즘은 4월에 피어야 할 꽃들이 벌써 성급하게 꽃망울을 틔우고, 가을에 물들어야 할 단풍나무도 이미 붉게 물들어 버렸다. 20여 년 전을 떠올려봐야 무슨 소용인가.



열쇠가 자꾸 헛돌았다. 가끔 깜박깜박하는 게 아무래도 또 연구실 문을 잠그지 않고 나왔던 모양이었다. 올해 들어 이런 일의 빈도가 늘고 있다. 이제 겨우 마흔둘, 쇼펜하우어의 말을 따르자면 이미 인생의 본문이 끝났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한참은 더 일해야 하고, 한참은 더 살아야 하는 40대다. 40대에 들어선 이후 이렇게 갑자기 늙어버린 느낌이 종종 엄습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연구실을 나설 때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그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시원하고 풋풋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막 꽃봉오리를 피운 어린 장미 꽃잎을 따다 이슬로 희석한다면 이런 향기가 날까. 향기에 취해 걷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책상 뒤쪽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흐흠’하며 인기척을 내보았지만, 상대는 미동도 없었다. 주인도 없는 연구실에 들어왔으면 깜짝 놀라야 할 사람은 나보다는 몰래 들어온 상대여야 할 텐데. 



하얀 셔츠에 스키니 진을 입은 내 앞의 존재는 윤이 나는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있었다. 가지런히 빗질한 흔적도 없이 대충 손가락으로 쓱쓱 빗어 올려 아무렇게나 묶은 그 머리채가 어쩐지 시선을 끌었다. 머리를 묶은 부분이 정중앙에 위치하지도 않는 걸 보니 성의 없이 묶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용수철처럼 돌돌 말린 보라색 머리끈도 심혈을 기울여 고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묶인 곳에서부터 어깨 밑으로 늘어지는 머리채의 순흑빛은 어딘가 고혹적인 데가 있었다. 숱이 많아 한 줌에 잡히지도 않을 머리카락들이 검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뒷모습은 정직하다. 까맣게 쏟아지는 머리채가 슬퍼 보였다.


뒷모습은 정직하다. 까맣게 쏟아지는 머리채가 슬퍼 보였다. 나보다 작은 키에 가녀린 몸, 특히 허리는 한 줌에 쥐어도 잡힐 것 같았다. 우리 학교 학생일까. 상대가 여자다 보니 함부로 손을 대어 몸을 돌려세울 수도 없었다. 우리 과 학생들 중 저런 머리를 한 여학생이 있었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말…….”

가는 허리와 발목을 보며 소프라노 음색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알토 톤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에 놀랐다. 

“정말 성경에 있나요?”

미동도 않던 존재가 드디어 서서히 몸을 돌렸다. 검은 폭포 같은 머리채에 어울리는 까만 두 눈동자가 내 시선을 조금도 피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마주 받아냈다. 아니 내 쪽에서 오히려 먼저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얀 피부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까맣게 도드라져 보이는 눈동자는 유독 검은 동자가 컸다.


호감 가는 상대를 바라볼 때 무의식적으로 동공이 커진다


호감 가는 상대를 바라볼 때 무의식적으로 동공이 커진다. 같은 얼굴이라도 동공이 커진 쪽의 사진에 호감을 표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 미묘한 변화는 무의식 중에 일어나고 거의 제어할 수 없어 진정한 감정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이미 몇 백 년 전 이탈리아의 고급 창녀들은 동공을 확대시키기 위해 유독한 풀인 벨라도나에서 추출한 약을 안약으로 사용했다. 과학적으로 검증되기 이전부터 경험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지금 이 상대의 눈동자는 뭐랄까, 모호한 데가 있다. 눈동자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이 나에 대한 강한 호감과 동시에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우리 학교 학생인가?”

이 짧은 질문을 더듬거리며 겨우 전했다.

“후훗, 교수님 깜짝 놀라셨나 봐요.”

여학생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입가에 살짝 대고 잠깐 웃었다. 손동작이 발레리나의 춤사위 같았다. 뒷모습만 보았을 때는 졸업반이거나 대학원생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웃는 모습이 신입생처럼 앳되었다.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다. 갑자기 손에 땀이 뱄다. 심리치료사이자 상담가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상대해 보았기에, 이제는 어떤 사람을 마주 하든 평온한 모습으로 대화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긴장감이 당혹스럽지만 짜릿하기도 했다.



“나한테 볼 일이 있어서 온 거라면 좀 앉지.”

책상 앞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앉으며 말했다. 더 이상 상대에게 휘둘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보니 잘 보여요. 저 잔디밭… 내가 잘 가는 덴데.”

여학생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며 자기 할 말만 했다. 내가 리드를 잡아 보려고 위치까지 바꾸며 말을 던졌건만, 테니스장에서 상대 없이 열심히 서브만 하는 느낌이었다.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열려있던데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하는 여학생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했다. 다시 보아도 아름다운 머리채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단정해 미인으로 볼 수 있지만, 매혹적인 흑발과 허리에서 발목에 이르는 곡선과 뒷모습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난 아직 내 연구실에 들어와 있는 자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일로 왔는지도 모르는데. 이리 와서 용건을 말하거나 아니면 지금 당장 나가 주게.”

평소 상담할 때의 목소리를 많이 회복해 차분하게 던진 문장이 말꼬리에 가서는 바람이 빠지듯 나도 모르게 기어들어갔다.

“교수님, 진짜 나가길 바라시는 건 아니죠? 후훗.”

상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달아오르는 얼굴을 들키기 싫어 얼굴을 문 쪽으로 돌리는데 상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알았어요. 그리로 갈게요. 화내지 마세요. 후훗.”

상대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계속 웃었다. 천천히 걸어와 내가 앉아 있는 1인용 소파와 기역자 방향으로 놓여 있는 긴 소파에 앉았다.


“예주예요. 홍예주. 2학년이고, 불문과. 물론 이 학교고요.”

더 이상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진짜로 문이 열려 있었어요. 노크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기에 손잡이를 살짝 돌려 봤거든요. 근데 열리더라고요, 진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어요. 창밖을 보니 내가 좋아하는 잔디밭이 보이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훗.”

뭐가 그리 우스운지 예주는 말끝마다 웃었다. 무단침입에 조금은 무례해 보이는 말투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예주와의 이런 목적도 용건도 없는 대화를 나도 모르게 즐기고 있었다

“바로 옆에 이렇게 건물이 있는데, 나무 몇 그루 옆에 있다고 아무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거, 너무 바보 같지 않나요?”

예주는 연신 재미있다는 듯 재잘댔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잔디밭이요. 아까부터 계속 잔디밭을 보고 있었거든요. 후훗. 조금 떨어져 있긴 해도 다 보이는데.”

무슨 생각이 다시 났는지 예주가 키득키득 웃었다.

“뭘 봤는데 그러지?”

“별거 아니에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교수님도 하실 행동 같은 거. 후훗.”


웃음이 뭔가 긴장되고, 불안하거나 걱정거리를 숨길 때도 사용되는 걸 볼 수 있다


내담자들을 관찰하다 보면 웃음이 뭔가 긴장되고, 불안하거나 걱정거리를 숨길 때도 사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예주의 웃음은 모호했다. 정말 모든 일이 저렇게 재미있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일부 내담자들처럼 뭔가를 숨기기 위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날 찾아온 용건은 뭐지?”

요리조리 피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주는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상담받고 싶어요.”

어쩌면 상담심리학 교수이며, 심리상담가인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답이었음에도, 예주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예주 학생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이번 학기는 내가 강의 스케줄도 조금 빡빡하고, 가능하면 우리 학교 학생은 내담자로 받지 않겠다는 내 나름대로 세운 원칙 같은 것도 있고.”

당연히 거절해야 할 대상에게 거절을 하면서도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예외 없는 법칙은 없죠. 후훗.”

예주의 동공이 더 커졌다.


상담을 할 때 상담자와 내담자 간에 생기는 신뢰 관계인 라포(rapport)는 상담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지만, 라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또는 역으로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끌릴 수 있다. 물론 그 모든 역동을 상담을 위해 잘 활용하는 것이 상담자의 역량이지만, 간혹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내담자가 있어 문제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학부 때 상담심리학을 가르치던 교수님 한 분이, 내담자가 자기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살을 해버려 심한 충격과 상처로 오랜 시간 상담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학교 안에서 괜히 원치 않는 스캔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상담해 주세요. 아니면 갑자기 한강에 확 뛰어내릴지 몰라요. 후훗.”

대답을 않고 뜸을 들이자 예주가 채근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점만 빼면 내담자로 받기에 위험 요소가 별로 없어 보였는데, 자살 협박이라니. 감정 기복이 심하거나 돌발행동을 할 여지가 있는 위험군일 수 있다. 자살이나 협박에 어울리지 않는 저 웃음은 또 뭔지. 농담하듯 웃어대는 예주를 보니, 이리저리 분석하고 재보는 내 머릿속의 모든 과정이 갑자기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갑자기 오기 같은 것이 발동했다.

“상담은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상담은 한두 번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대부분 장기로 진행해. 내 경우엔 적게 잡아도 시간당 비용이 꽤 될 텐데, 부담할 수 있겠나?” 

일부러 정색을 하고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설마 학생에게도 돈을 받으실 줄은 몰랐는데. 그 돈이 있음 병원 같은 델 갔겠죠. 아니다. 병원은 정신병자 취급받는 것 같아서 싫긴 하다. 후훗.”


나도 모르게 예주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계속 키득대는 예주를 바라보고 있자니, 저렇게 만사가 가볍고 재미있는 애가 왜 와서 상담 같은 걸 받겠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자연스럽게 웃고 있지만, 역시 그 웃음의 의미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본래의 나라면 이 아까운 시간을 더 이상 낭비하지 않고 서둘러 돌려보낼 텐데, 나도 모르게 예주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예외는 있지, 물론 그동안에도 있었고.”

무심코 입을 여는데, 문득 우리 과 여학생 하나가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무료로 2년간 상담해 준 사례가 떠올랐다.

“좋아, 예외를 하나 더 만드는 셈 치고 받아 주지. 대신 무조건 내 스케줄에 맞춰 주면 좋겠는데. 이번 학기는 정말 바빠서 말이야. 매주 금요일 오후 4시, 괜찮은가?”

갑자기 두 사람의 입장이 바뀌기라도 한 듯 예주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네, 그럼 금요일에 올게요.”

목적한 바를 달성하자마자 예주는 벌떡 일어나,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고개를 꾸벅하더니 그대로 총총히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버릇없는 녀석이라 여겨야 마땅한데, 웃음이 났다. 예주가 남기고 간 싱그러운 잔향이 한참 동안 연구실 안을 떠돌았다. 분명 낯선 얼굴이었는데, 예주가 남기고 간 향기가 기억의 한 부분을 계속 간질였다. 


(다음 화에 계속)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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