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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06. 2024

4 홍예주란 인간은 열여섯 살에 죽었어요

중요한 기억이 지워져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상담까지 아직 15분 남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문득 예주가 처음 찾아온 날이 떠올랐다. 예주의 머리 기울기와 시선의 각도 등을 떠올리며 예주가 보았을 그 풍경을 향해 시선을 더듬어 보았다. 잔디밭이 보였다. 학생들 몇이 분주하게 제 갈 길을 걸어갔다. 드문드문 심긴 나무 사이에 나란히 서있는 긴 머리의 여학생 둘이 시선을 끌었다. 짧은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마치 쌍둥이 자매 같았다. 한쪽은 붉은빛의 화려한 꽃무늬 프린트 원피스고 다른 한쪽은 순백의 원피스다. 쭉쭉 곧게 뻗은 네 개의 다리가 시원시원했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꽃무늬 원피스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순백의 원피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키스를 했다.


뭔가 부자연스럽다고 느낀 건 이미 키스가 한참 진행된 뒤였고


영화 속에서 늘 보던 백인 남녀 배우의 키스처럼 자연스럽고 우아한 키스였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뭔가 부자연스럽다고 느낀 건 이미 키스가 한참 진행된 뒤였고, 뒤로 돌아선 후에도 한참 동안 뭐가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입맛이 씁쓸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아 상담일지를 넘겼지만, 집중이 안 되었다. 이제는 확실히 끊었다고 장담하며 남은 담배를 모두 내다 버렸으니, 꽁초 하나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딸각’하고 문손잡이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주가 연구실에 들어왔다.

늦은 줄 알고 뛰어왔더니 너무 더워요.

그동안 바지 차림이던 예주가 오늘은 하얀 원피스에 짧은 청재킷을 걸쳤다. 작고 동그란 칼라가 달린 짧은 원피스가 발랄한 느낌을 주었다. 짧은 스커트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를 보다 잠시 머리가 핑 돌았다. 예주는 소파에 앉자마자 청재킷을 벗었다. 순백의 원피스 위로 예주의 까만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


꽃무늬 원피스와 순백의 원피스의 키스 장면이 머릿속에 계속 아른거렸다

친구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친구? 친구 관계는 좋은 편인가?

상담자답지 못하게 추궁하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남자 친구를 못 사귀어서 그렇지 여자 친구랑은 관계 좋거든요.

똑똑 끊어서 대답하는 예주의 말투는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고 내게 경고장을 날리는 것 같았다. 얼른 머릿속 잔상을 흔들어 떨며, 정신을 차리고 상담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무슨 해괴망측한 상상인지. 그 순백의 원피스가 예주라는 아무런 증거도 없으면서.


홍예주란 인간은 열여섯 살에 죽었어요


홍예주란 인간은 열여섯 살에 죽었어요.

소파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은 예주가 내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고 정면을 멍하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워밍업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나의 망측한 상상으로 분위기가 불편하게 흐르고 있던 순간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가는 예주의 말에 깜짝 놀랐다. 겨우 한 번의 상담으로 나와 충분한 라포가 형성되었다는 건가. 라포는 상담자와 내담자 간에 신뢰와 공감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친밀한 관계를 말한다. 새로운 내담자는 끊임없이 상담자를 의심하고 시험하기 때문에 라포를 형성하는 데 보통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예주는 이제 겨우 두 번째 상담에서 심각한 주제를 꺼내려는 것이다. 


학교 끝나고…… 학원까지 마치고 늦게 집에 돌아왔을 때였어요. 웬일인지 아빠가 문을 열어 주는 거예요. 엄마는 밖에 나갔다면서…….

예주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빠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였어요. 조금 무서워 보이기도 했고.

예주의 얼굴을 관찰하며 묵묵히 들었다.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있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근데 아빠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거예요. 갑자기 짜증이 확 나서, ‘노크도 없이 들어오면 어떡해?’하고 소리를 빽 질렀어요. 근데 아빠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 무서운 얼굴로 멈추지 않고 들어와 문을 쾅 닫아 버리는 거예요.

하얗게 질려있는 예주는 마치 과거의 그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기라도 하듯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삐 삐비비 삐비!

속옷차림으로 서 있는 예주를 향해 예주 아빠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무슨 말을 계속 반복하며 다가왔다. 무언가 중요한 말인 것 같은데, 예주의 기억 속에서 그 부분만 지워져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TV 프로그램 도중 욕설이 나오는 부분만 ‘삐-’하는 기계음으로 처리되는 것처럼, 기억 속의 그 장면 역시 아빠의 말을 지워 버렸다. 아빠는 겁에 질려 가슴을 가리고 서 있는 예주를 그대로 침대 위로 밀어 넘어뜨렸다.


삐 삐비비 삐비!

차가운 목소리로 반복되는 아빠의 말. 저주인지, 주문인지……. 아빠에게 겁탈당하는 내내 예주는 온몸이 마비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있는 힘껏 밀고 발로 찬다면 50대 중반의 아빠에게서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쩐 일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삐 삐비비 삐비!’하는 아빠의 차가운 목소리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온몸에 힘이 빠지고, 눈에서 눈물만 흘렀다. 아빠는 무서운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거칠고 빠르게 예주를 짓뭉갰다. 아빠의 얼굴이 가까이 닿자 술 냄새가 확 끼쳤다. 일을 마친 아빠가 바지를 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누워 있는 예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예주와 눈이 마주쳤다. 예주가 훌쩍이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애처롭게 입을 열었다. 

아……빠.

눈에 경멸의 빛이 서리더니, 아빠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지고 나가 버렸다.

삐비 삐 삐비 삐비비 삐비비 삐비 삐비비 삐 삐비비 삐비 삐 삐비비 삐!

그때까지 예주는 머릿속으로 ‘이건 현실이 아니야, 꿈일 뿐이야. 뭔가 착오가 있는 거야. 아빠가 너무 취해서 잘못 보고 있는 거야.’ 등 고통을 줄이기 위한 합리화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아빠의 마지막 일격에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갑자기 우주를 떠도는 고아가 된 기분이었어요


이야기하는 내내 예주는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꼼짝도 않고 정면의 한 곳만을 응시했다.  

갑자기 우주를 떠도는 고아가 된 기분이었어요.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하던 예주의 입이 다시 열렸다.


(다음 화에 계속)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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