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Aug 07. 2024

5 순결을 잃었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했어요

심리적 항거 불능 상태인 ‘학대 순응 증후군'

침대 위의 핏자국을 지우고 욕실에 들어가 몸을 박박 닦는 내내 눈물이 그치지 않았어요. 세상으로부터 날 보호해 주던 아빠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날 미치게 했어요.

그제야 예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티슈 두 장을 뽑아 예주에게 건네주었다. 뚫어지게 정면만 응시하던 예주가 그제야 시선을 떨구며 티슈를 받아 들었다. 티슈를 쥐어 줄 때 살짝 닿은 예주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흠칫 놀랐다. 


순결을 잃었다는 생각 같은 건 별로 안 했어요. 그까짓 것.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 예주는 길을 잃고 떨고 있는 아기 비둘기 같았다. 내 손안에 딱 맞게 들어올 그 작고 하얀 손을 꼭 쥐고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작고 가녀린 어린 새를 따뜻한 손으로 안아 주고 싶었다.


아빤 그 후로도 가끔, 술을 마시거나 하면 엄마 몰래 내 방을 찾아왔어요. 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요. 문제를 일으켜봐야 이득 될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이제 내 편도 없고, 날 보호해 줄 사람도 없고.

한참을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예주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순결을 잃었다는 생각 같은 건 별로 안 했어요. 그까짓 것.

예주는 순간 주먹을 꼭 쥐었다.

학교에도 경험 있는 애들은 넘쳐나는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예주의 얼굴에 적의가 느껴졌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는가. 이솝 우화의 여우가 포도가 시기 때문에 먹을 필요 없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것처럼 합리화일 뿐이다.

“엄마한테도 그 일에 대해 얘기해 본 적 없나? 엄마가 도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엄마란 말이 나오자마자 예주의 몸이 부르르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예주의 눈에 경멸의 빛이 서렸다.

엄만 짜증 나는 존재예요. 구질구질하고. 엄마가 날 보호해요? 그런 덴 아마 관심 없을 걸? 아빠를 그렇게 만든 게 엄만데.  
아빠를 그렇게 만든 게 엄마라고 말했는데, 그게 어떤 뜻인지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첫 상담 때부터 예주는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예주에게 어머니는 가난하고 무기력한 존재다. 스무 살 많은 아버지랑 결혼하려는 발상 자체가 사랑도 없으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이용하려는 자포자기적 태도라며 대놓고 경멸했다. 대학도 나오지 못한 어머니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아버지가 서포트를 해줬지만, 어머니는 무기력증에 빠져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극정성으로 지원하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늘 외롭게 했고, 어머니의 말수마저 점점 줄어갔다. 예주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건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예주는 그 모든 일의 원인 제공자가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보지 않아 정확한 진단은 내릴 수 없지만, 예주의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권위자에게 응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항거 불능 상태인 ‘학대 순응 증후군’


근친상간 중 가장 혐오되면서도 가장 흔한 형태가 아버지와 딸 간의 관계다. 예주의 경우, 어머니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 아버지를 정서적으로나 성적으로 방치해 두었고, 어머니와 딸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딸이 아내를 대신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근친상간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환경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주가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것도,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순순히 권위자에게 응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항거 불능 상태인 ‘학대 순응 증후군’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상담 중 개인적인 판단은 보류해야 함에도, 예순이 다 된 예주 아버지가 어리고 여린 예주를 유린하는 장면이 순간 머리를 스치면서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감정을 급히 추스르느라 헛기침을 한 번 하는데, 그 소리에 예주가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잠깐만요. 그대로 계세요.

예주는 뭔가를 발견한 듯 눈이 동그래지며, 소파에 기댔던 등을 살짝 일으켜 오른손을 내게로 뻗었다. 손목 안쪽에 향수를 뿌렸는지, 예주의 손가락이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 순간 상쾌한 꽃향기가 훅 끼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 두 개가 내 귓불을 살짝 잡아당기는가 싶더니,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후훗, 머리카락이 어떻게 거기에 붙어 있네요.

짧은 머리카락을 들어 내 눈앞에 보이며, 예주가 웃었다. 드디어 예주가 웃었다. 첫 만남부터 항상 밝고 쾌활하게 웃던 예주. 오늘 만남에서는 처음 보인 웃음이었다. 예주가 웃으니 나도 모르게 활짝 따라 웃었다.

억압되어 있는 감정들을 차근차근 깨닫게 해줘야 하고, 좀 더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지만. 그런 모든 해야 하는 일들이 아련히 멀어져 갔다. 그냥 지금 여기서 예주와 함께 이렇게 계속 웃고 싶다. 


벌써 시간이 다 됐네요. 빨리 마무리하셔야죠.

예주가 내 왼쪽 손목에 있는 시계를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첫 상담에서 상담 시간이 늘어지면 안 되고 칼 같이 지켜야 한다고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던 내가, 빙긋 웃으며 시간을 일깨워주는 예주 앞에서 무안해졌다. 예주와의 상담 시간에는 시곗바늘이 더 빠른 보폭으로 걸어가는 게 틀림없다. 허둥지둥 오늘 예주가 꺼낸 얘기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교수님도 혹시 딸이 있어요?

이제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아들이 하나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예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에 딸이 있어도 교수님은 그러지 않으시겠죠?
글쎄……. 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이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지만, 사람은 그 어떤 것도 단정해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


말끝을 흐렸다. 속으로는 어떻게 그런 구역질 나는 일을 생각할 수 있냐고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런 개인적인 감정 표출로 내담자에게 피해를 줄 만큼 어리석고 미성숙한 상담자는 아니다. 예주의 머릿속이 복잡한 무엇으로 가득 차오르는 듯 시선의 초점이 흐려졌다.


만약에 딸이 있어도 교수님은 그러지 않으시겠죠?


힘겨운 얘기와 눈물로 많이 지쳐 보이는 예주를 연구실 문까지 배웅했다. 벗어 놓은 청재킷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앞장서 걷고 있는 예주의 머리카락에도 이슬 머금은 여린 장미꽃잎 같은 향기가 배어 있었다. 거의 문 앞에 다 왔을 때 갑자기 예주가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며 발을 헛디뎠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뒤에서 예주의 양팔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가녀린 팔. 예주의 긴 머리카락들이 내 팔에 닿아 어지럽게 간질이더니 이내 예주가 균형을 되찾았다.

죄송해요.


균형을 되찾고 바로 서자마자 휙 뒤돌아 꾸벅 인사를 했는데, 너무 가까이 있던 터라 하마터면 예주의 얼굴이 내 가슴에 부딪힐 뻔했다. 여전히 예주를 향해 뻗고 있던 내 팔을 예주의 머리카락들이 다시 한번 어지럽게 간질였다.

그렇게 예주는 또 총총히 사라졌다.


천진난만하게 까르르 웃다가도 언뜻언뜻 비치던 슬픈 빛이 조금씩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예주가 열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해왔다는 사실을 상담일지에 기록하는데, 왼쪽 가슴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잠시 펜을 내려놓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폈다. 얼굴도 모르는 그 늙은이를 한 방 먹이고 싶었다. 타고난 냉정한 성격 덕에 내담자와의 거리 두기에 실패한 적이 없던 나로서는 특이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예주의 긴 손가락이 닿았던 왼쪽 귓불을 살짝 만져보았다. 아직도 예주의 잔향이 남아 있다. 몇 달 전 끊어 놓고 귀찮아서 가지 않은 헬스장에 들렀다 가야겠다. 살짝 처지기 시작한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다음 화에 계속)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1:1 글쓰기 코칭 신청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이전 04화 4 홍예주란 인간은 열여섯 살에 죽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