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72
마흔이 넘고부터 대화의 주제는 늘 비슷하다. 어디가 아프고, 뭘 먹으면 덜 늙는지, 무슨 운동이 유행인지. 그 대화 속에서 가끔 안도한다. 나만 고장 난 게 아니구나.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반복이 희미한 슬픔으로 번진다. 늙어가는 일이, 낡아가는 일처럼 여겨져서.
그러던 중 교회 모임에서 일흔이 넘은 권사님 한 분을 만났다. 혹시 모임 분위기가 무거워질까 잠시 염려했지만, 기우였다. 그분은 그 누구보다 생생하고 활기가 넘쳤다. 새 노래를 배우면 가사를 다 외워 흥얼거리고, 배드민턴 라켓을 휘두를 때는 소녀처럼 웃었다. 몸이 아픈 날에도 침대에 눕지 않고 밖으로 나가 공기를 마셨고, 돌아오면 얼굴빛이 정말 환해졌다. 함께 대화하다 보면 젊은 우리가 오히려 더 보수적이고 닫혀 있다는 걸 깨닫곤 했다. 그분의 시간은 달력 밖에서 흐르는 듯했다.
모임 후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었다.
"침대보다는 말 위에서 죽고 싶다."
잠시 책을 덮고 권사님 얼굴을 떠올렸다. 바로 책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다. 다음 날 권사님은 좋은 책 소개해 줘서 고맙다며, 몽테뉴에 반했다고 했다. 바로 이북으로 찾아 읽으신 것이다. 진정 침대가 아니라 말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 멈추지 않는 사람.
보통 나이가 들면 위험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가면 다친다, 무리하면 탈 난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게 정말 안전한 걸까. 움직이지 않는 건 결국 식물이고, 돌이다. 살아서도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면, 삶을 조금 더 길게 이어 붙이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이 들어 긴 여행을 떠나면 결코 돌아올 수 없을 거라고 겁을 주는 사람들에게 몽테뉴는 말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돌아오기 위함도, 끝까지 가기 위함도 아니라, 단지 걷는 것이 좋아서라고.
몽테뉴를 읽으며, 문득 내 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선명해졌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쓰는 게 좋아서 쓰는 글. 무엇을 얻으려는 계산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로서의 문장. 틀렸다는 말을 들어도, 흘러가듯 시도하는 글. '에세 (Les Essais)'라는 말 자체가 '시도'라는 뜻이다. 몽테뉴는 16세기, 아무도 하지 않던 시도를 통해 '에세이'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독자 여러분, 이렇듯 이 책의 소재는 바로 저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찮고 쓸데없는 책으로 소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몽테뉴 『수상록』저자의 말 중
나는 침대보다는 문장 위에서, 안락함보다는 떨림 위에서, 목적보다 기쁨 위에서 늙어가고 싶다. 움직이고 싶어서 움직이는 자, 쓰고 싶어서 쓰는 자. 그는 결국 늙을지라도, 낡지는 않는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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