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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14. 2020

사진을 찍을 여유도, 이유도 없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사진에 대한 단상

한창 젊을 때 사진이 거의 없다. 방송국에서 방송을 하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야외 촬영을 하던 때, 중고 트레일러에 살면서 기어가는 뱀을 보며 스타푸르트를 따 먹던 때, 미국 50개 주 중 48개 주를 돌았을 때, 짧은 원피스를 입고 드럼을 연주하며 콘서트를 했을 때 사진이 없다. 잦은 여행과 이사로 찍었던 사진을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불꽃을 활활 태우며 살아가고 있을 때는 카메라를 찾아 들이댈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그 시간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아름다웠기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소중한 것들은 사진이 아닌 기억 속에 남는다고 믿었으니까. 비록 기억에는 무수한 변형과 왜곡이 있지만, 편집 과정을 거치고 남은 기억이 결국 내가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설사 기억에서 사라진 풍광과 경험들이 많다 해도 잊힐 때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남아야 하는 건 남고, 사라져야 하는 건 사라지도록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최근 글쓰기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사진을 꽤 찍는데, 찍고 나면 자주 후회한다. 사진을 찍느라 놓친 것들, 프레임 안의 것들을 보느라 보지 못한 프레임 밖의 것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 대신 차라리 충분히 바라보고, 시각 외의 다른 감각기관들을 최대한 열어 느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들. 


반대로 내가 놓쳐버린 어떤 것들을 사진이 붙들어 놓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사진에서 예기치 못한 의외의 것들을 발견하기도 하니까.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존재감 희미한 누군가의 시선 같은 것. 익숙해서 잘 안다고 여겼던 피사체를 낯설게 보도록 하는 사진을 만나면 반갑다. 


위구르 족 뮤직 클럽 (좌), 싱가포르 에스컬레이터에서 잘린 신발 (중), 하와이 섬 (빅 아일랜드) 화산 분출의 흔적 위 그림자 (우)


사진의 홍수 속에서 무의미하게 흘러갈 사진이 아닌 정말 놓치기 아까운 귀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사진을 찍고 싶다. 시간이 흐른 후 사진을 꺼내 보며 많은 걸 추억하고, 추억 위에 이야기를 더해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쩌면 더욱 바라는 건 카메라를 들 여유도, 이유도 없던 시간들을 되찾는 걸지도 모르겠다. 초집중으로 몰입해 남김없이 활활 태우며 살 던 열정의 시절을.


공에 맞는 순간 (좌), 생떼밀리옹 골목을 걷던 나 (중), '18 월드컵 독일 전 중계 때 카메라에 잡힌 TV 화면을 지인이 찍어 보내줌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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