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우리를 가둔다 해도 우리의 모든 것이 갇힌 것은 아니다
“8평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텔레비전 보는 게 전부.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뉴스에서 아내의 살해 소식을 접한다. 게다가 아내의 살인범으로 자신이 지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복수를 위해 체력단련을 하고, 자신을 가둘만한 사람을 모조리 기억 속에서 꺼내 기록한다.”
영화 <올드 보이> 내용 중 일부다.
주인공 오대수가 좁은 방에서 체력단련을 했다는 내용에 관심이 꽂혔다. 물론 그처럼 15년씩 감금될 리도 없고, 더구나 복수해야 할 대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좁은 방에서 부풀어 오르는 감정 과잉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격리된 첫날부터 답답하면 일어나 걸었다. 쏟아지는 번민과 흐무러진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아무것도 맘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자기 몸을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한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내가 걷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일어나 따라 걸었다. 각자 이어폰을 꽂고 좁은 방에서 계속 서로 몸을 부딪혀가며 걷고 또 걷는 광경을 누가 본다면 얼마나 기이할까.
작은 아이는 격리된 지난 일주일 동안 평균 만 3천 보를 걸었다. 하루에 2만 보를 넘긴 날도 있었다. (나는 간신히 평균 8천 보, 큰 아이는 평균 6천 보를 걸었다.) 큰 아이는 푸시업을 매일 100개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시작할 때만 해도 2,30개 하던 수준이었다.
방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열 걸음 정도 된다. 한 바퀴 돌면 20 걸음을 걸은 셈이다. 2만 보를 걸으려면 좁은 방을 1,000 바퀴를 돌아야 한다. 걷다 보면 다리가 아프기보다 어지럽다. 격리된 일주일 동안 우리는 이 좁은 방안을 수천 바퀴씩 돌았다. 막내 아이의 경우 거의 5천 바퀴 가까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까지의 거리가 겨우 7미터인 방을 70 킬로미터 가까이 확장시킨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직감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마음보다 훨씬 중요한 게 몸이라는 것을. 몸이 먼저 움직이면 마음도 따라간다는 것을.
누군가가 우리를 가둔다 해도 우리의 모든 것이 갇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