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긋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말로 예 아니오를 해주면 정말 편할 텐데.
그게 아니면 일필휘지로 O X 표시라도 해주면 그나마 정말 편할 텐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는 아이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도 주먹으로 펜을 잡는 단계였고 그저 선을 난화처럼 긋는 정도에 그치는 정도의 발달 상태였다. 나는 아이가 여러 가지로 색을 바꿔가며 긋는 것에 만족하며 얼마나 무엇을 시켜볼 수 있을지 관찰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손이 머리를 못 따라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한글을 낱말 단위로 기억하고 변별하기 시작하는 단계였고, 나는 O X 카드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조금씩 소통하고 있었다. 아래의 내용은 시중에 나와 있는 학습지들, 발달 단계 가이드북들, 그리고 인지치료 관련 전공서들을 다수 읽어보고 조합한 방법이다.
첫 번째 단계는 선긋기. 선긋기는 시지각과 소근육의 협응 능력이 발현되는 활동이라는 점을 먼저 알아야 한다. 시지각은 색종이 변별 활동부터 해왔으므로 어느 정도 훈련이 되었다고 전제하였다. 소근육은 손으로 펜을 잡고 선을 그어낼 수 있는 수준이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연필 잡는 모양을 가지고 처음부터 씨름을 할 필요는 없다. 그어야 하는 선의 난이도가 올라가고 길어질수록 조금씩 맞춰서 교정하면 된다. 이 부분은 감각통합 치료의 도움을 받았다. 아이가 선을 긋는 모습을 찍어서 미리 보내드리고, 다음 단계에서는 어떻게 잡는 게 좋은지 내지는 어떤 방법으로 교정을 해주면 좋을지 활동해 달라고 부탁드렸고, 설명에 기해 집에서 계속 연습을 해주었다. 무리하지 않아야 선긋기 활동에 거부가 없으므로 한 박자 늦게 가는 느낌으로 아이가 싫어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진행하여 달라고 부탁드렸다.
선긋기 난이도는 가로선이 최하난이도이고, 세로선이 더 어렵다. 선긋기 난이도가 궁금하면, 시중에 나와 있는 만 2세 첫 선긋기 교재를 참고하면 된다. 발달과정에 맞춰서 난이도에 따른 과제가 다 정리되어 있다. 만일 아이가 가로선을 잘 못 긋는다면, 손으로 펜을 잡는 것이 아직 불안정한 지, 눈으로 그어야 할 선을 쫓아가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어려운 경우인지를 감안해서 선의 길이나 출발/도착 지점 표시를 달리 하여 아이가 연습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손으로 펜을 잡는 것이 어려운 경우에는 펜의 굵기와 모양을 고민해야 한다. 펜 외관 재질에 따라 촉각적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도 있고, 마감재의 재질에서 반사되는 빛을 힘들어하는 아이도 있고, 펜에서 나는 화학 물질 냄새를 싫어하는 아이도 있고, 펜의 굵기가 주는 소근육의 긴장도에 따라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다. 적당한 펜을 찾아야 아이가 편하게 연습할 수 있으므로 원인을 찾아서 나만의 펜을 찾아주는 것이 좋다. 참고로, 아이들의 크레용 크기를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지만 펜이 두꺼울수록 잡기는 쉽고 손 모양을 3점 모양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펜의 두께는 일반 아이들도 차차 줄여나가는 식으로 성장하고, 크레파스가 다양한 두께로 나오므로 이것은 적당한 아이템을 찾기가 더 쉽다. 우리는 보드마커 즉 유성펜을 이용하였는데, 만일 아이가 유성펜에서 나는 미묘한 냄새를 싫어한다면 종이 위에 색연필이나 크레파스 등을 이용해서 해야 한다.
우선, 눈으로 그어야 할 선을 보는 것이 어려운 경우에는 적당한 굵기와 색으로 선이 나오는 펜을 골라야 한다. 아이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색과 굵기가 있으므로 아이가 스스로 고르게 한다. 고르지 못한다면 여러 번 이것저것 써보게 하고 골라주어야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활동이 불쾌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펜을 고르고 나면, 클리어파일 최대한 투명한 것을 고른다. 유성펜을 고른 이유는 이 클리어파일 위에 선을 긋도록 해서 연습하기 위함이다. 수성펜은 선이 잘 그어지지 않는다. 클리어파일을 이용하는 이유는 여러 번 활용할 수 있고, 실수를 쉽게 지울 수 있어서이다. 자신의 실수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아이의 부담이 줄어든다. 동시에 한번 더 해볼 마음이 쉽게 들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스케치북을 많이 준비해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으면 굳이 클리어파일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A4크기의 종이를 준비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스티커를 좌우 나란히 붙이되 약 3센티미터나 5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붙인다. 스티커를 잇는 선을 연필로 적당히 연하게(아이가 알아차리고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의 굵기와 농도) 그어주고, 그 종이를 클리어 파일에 넣는다. 종이를 뺄 수 없도록 테이프로 파일을 마감하고 아이와 함께 앉는다. 아이 옆에 앉아서 아이 눈높이에서 파일을 바라보아서, 집 안의 전등이 파일에 반사되는지 확인한다. 만일 천정 등에서 반사가 이루어진다면 등지고 앉아서 차라리 그늘지게 만든다. 집 안 적당한 곳을 찾아서 선긋기 활동을 하는 자리로 세팅한다. 그 자리가 책상을 가져갈 수 있는 자리라면 아이가 가장 시야가 편안한 자리에 앉히고 가르치는 사람은 옆에 앉는다. 앞에 앉는 방식보다 훨씬 아이가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맞은 편의 "배경"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시각적으로 집중하거나 신경 써야 할 것이 줄어들어서 활동에만 시선을 고정하기가 더 쉬웠다. 책상을 가져갈 수 없는 자리라면 적당한 크기의 쟁반이나 방석이 부착된 노트북 받침을 구해서 클리어 파일과 펜을 가지고 이동식 책상으로 쓴다. 높이가 맞지 않는다면, 쟁반이나 노트북 받침대 밑에 적당한 두께의 방석이나 아기 베개를 받쳐주는 방법으로 마치 책상에 앉은 것 같은 높이를 만들어준다. 쟁반이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방석 하나를 희생하자. 책상보다 싸고 아이의 자세에 최적화되어 있으므로 하나 더 만들어서 차 안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어깨가 솟거나 손목이 공중에 뜨면 제대로 연습할 수가 없다. 이건 책상에 앉아서 활동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체크해 준다. 반드시 아이를 자리에 앉히고 자세를 확인해 주고, 빛반사와 밝기를 아이 눈높이 아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진행한다.
선긋기가 처음인 아이는 펜을 쥐게 한 후, 왼쪽 스티커에 펜을 대도록 하고 "출발!"하고 말한 뒤 선을 따라 옆으로 선을 그어서 오른쪽 스티커에 "도착!" 하게 한다. 아이와 함께 도착을 즐거워하고 휴지로 지우게 한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출발!"하고 "도착!" 한다. 지우는 것은 아이가 하도록 하는 게 좋은데, 하기 싫어하면 처음에는 대신해 준다. 익숙해지면 차차 스스로 지우게 한다. 자기가 한 것은 자기가 치운다는 의미도 있고, 자기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스스로 이것을 교정하는 것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익숙해지면 1센티씩 늘려서 연습을 하고, 어느 정도 길이에서 아이가 진도가 부진해지면 스티커만 부착한 상태로 처음 시작했던 3센티미터 혹은 5센티미터 길이의 선을 긋는 연습으로 한다. 보조선이 없어진 상태에서 아이가 혼자 옆으로 긋는 것을 연습시키는 것인데, 이것과 보조선이 있는 더 긴 선을 긋는 활동을 함께 한다. 그리고, 앞선 활동에서 했듯이 제일 어려운 것을 먼저 시키고, 잘 안되면 차난이도를 시키고 마지막은 제일 좋아하거나 잘하는 활동을 시킨다. 간혹 힘조절이 어려운 아이는 3센티나 5센티 길이를 어려워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아이가 적당히 펜으로 쉽게 그을 수 있는 길이를 찾아서 스티커를 붙여주고 스티커끼리 잇는 활동을 하면 된다. 아이마다 성향이나 근육의 발달 정도가 달라서 짧은 선을 어려워하는 아이도 있고, 긴 선을 어려워하는 아이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짧은 선도 긴 선도 그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니 어떤 길이부터 시작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아이가 잘하는 것은 물론, 못 하는 길이까지도 연습을 하도록 하면 된다.
3센티 길이부터 시작했다고 전제하였을 때, 3센티 길이의 선을 긋는 종이부터 차례대로 활동지가 생기므로 하나씩 별개의 클리어파일에 넣어서 잘 보관하면 매번 활동지를 새로 만들지 않고 꺼내어 쓰면 된다. 활동지들은 꺼내 쓰기 편하도록 회사에서 쓰는 서류보관함에 넣어둔다. 서랍형으로 당겨서 여는 것 말고 오픈형으로 3층 정도로 된 것이 적당한데, 진도의 난이도에 따라 상중하로 나누어서 보관하면 꺼내어 쓰기도 좋고, 아이가 특히 좋아하는 활동지들을 아이가 꺼내기 수월한 칸에 모아두면 아이가 혼자 꺼내어서 즐길 수 있다. 나에게 이 방법을 알려주신 어머님은 아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 학교에 보낸다고 하셨다. 도움반 아이들 모두 그 활동을 너무 좋아해서, 특수학급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이 해야 하는 활동을 마치고 나면 상으로 주는 놀잇감으로 사용하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A4 지는 보통 세로로 긴 종이 모양으로 사용하는데, 가로선 긋기를 연습할 때에는 파일을 가로로 놓고 쓰면 된다. 나중에 이 파일을 세로로 놓으면 세로선 긋기가 되고, 사선으로 두고 쓰면 사선 긋기가 되므로 재활용하기도 편하다.
그 이후의 선들도 같은 방식으로 연습하면 된다. 시중에 나와 있는 교재들은 교육적으로 아이의 발달 단계에 맞추어 짜놓은 커리큘럼이므로 그것을 따르면 난이도를 감안한 진도를 짤 수 있다. 나는 학습지의 색상이 아이의 시선을 분산시킨다고 생각하여 활동지를 잘라서 흑백으로 확대복사하여 파일에 넣어서 활용하기도 하였다. 다만, 출판사에 따라 해당 나이보다 어려운 교재 혹은 쉬운 교재를 내놓으니 내 아이가 좋아하고 맞다고 생각되는 출판사를 찾는 것이 또 다른 과제이다. 서점에 가서 둘러보고 보여주고 잘 선택해 보자. 만 2세 교재인데 어려운 버전은 쉬운 교재의 만 3세 버전을 들어가기 전에 해주면 좋다. 연령이 올라갈수록 난이도 레벨이 확실히 다르므로 좌절하지 말고, 나이에 비해 어려운 문제집을 내놓았다고 흉보지 말고 이걸 감사한 마음으로 잘 활용해 주자.
선긋기를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아이가 글씨를 쓰는 데에 필요한 방향의 선들을 다 긋을 수 있게 된다. 선긋기 교재들은 그림 그리기와 연결이 되므로 아이는 자유자재로 이리저리 선을 그을 수 있게 된다. 아이가 글씨 쓰기를 거부하지 않는지 잘 보고, 클리어 파일에 아이 이름을 한 글자씩 적어서 활동지로 만들어주자. 아이가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것은 한글 쓰기에 커다란 동기 부여가 된다. 자기 이름을 쓰고 싶어 한다면, 자기 물건에 자기 이름을 써보도록 하자. 집에서 사용하는 스케치북이나 종합장에도 이름을 적고, 작은 글씨를 연습하고 싶을 때에는 견출지에 쓰도록 해서 아이의 색연필이나 크레파스에 붙여줘도 좋다. 아이가 외투 안의 라벨이나 실내화 안쪽 등 어디든 자기 물건임을 표시하고 싶어 하는 곳에 쓰도록 해주면 아이가 익힌 것을 활용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므로 웬만하면 허락해 주었다. 다른 글자들도 이렇게 차차 연습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