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떼기

음절과 음소

by 흐린 뒤에는 맑음

이제 진짜로 한글을 가르쳐보자.


시간이 지나 왠지 아이가 감자깡을 글자로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잘 보면 보인다. 아무 이유 없이(는 아니고 내가 던진 미끼이지만) 감자깡이라고 써서 식탁에 던져둔 걸 가지고 온다거나, 전단지에 쓰인 글자를 보고 읽어내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활동판의 감자깡 글자를 음절별로 오려서 감/자/깡 세 개의 글자로 만든다. 그리고 깡/감/자/라고 붙여둔다. 아이가 감자깡 글자를 가지러 왔는데 혹은 지나가다 보았는데, 모양이 이상하다는 듯 서성이면 즉시 달려가서 "깡감자"라고 읽어주고 즉시 "깡"자를 옮겨서 감자깡 순서대로 붙인 뒤 다시 "감자깡"이라고 읽어준다. 그러면 아이는 자리를 바꾸는 글자를 보고 거기에서 나는 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통글자 단위로 음소를 접하게 된다.


한글의 최대 장점은 이런 식으로 글자를 잘라서 음절을 알려줄 수 있다는 점이다. 영어는 불가능하다. 어디에서 잘라야 하는지 아이가 눈으로 음절 단위를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 몰래 깡감자로 바꿔놓고 아이가 스스로 이걸 감자깡으로 바꾸는지, 다 떼어와서 감자깡이라는 원래의 순서대로 자리에 맞게 놓고 감자깡이라고 읽으면서 요구를 하는지 살펴보자. 잘 안 되면 아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슬쩍 떨어뜨린 다음 주워서 제대로 놓아주거나 콧바람으로 날려서 흩어지게 한 다음 떨어뜨려 미안하다 하고 제대로 맞게 놔주고 글자를 읽는지 살핀다. 잘 안 맞춰지는 좌절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하되 스스로 최대한 노력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제대로 놔두었을 때 읽으면 전에 했던 것처럼 즉시 상을 주어야 한다.


아이의 이름도 이렇게 가르치면 된다. 다른 활동판에 아이의 사진을 붙이고 그 아래에 이름을 붙여둔다. 아이 옆에는 엄마나 아빠의 사진을 붙이고, 그 밑에 엄마 혹은 아빠라고 써둔다. 부모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이유는 음절의 개수를 다르게 하여 아이가 눈으로 보았을 때 헷갈릴 가능성을 줄여서 변별력을 높이고(즉 자기 이름을 더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차별화하고), 음절 개수가 달라 읽어줄 때 글자를 짚는 것만으로도 음절의 단위에 대한 청각적 변별성이 높아지며(2개와 3개가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며), 아이가 부모님 이름을 아는 것보다는 일단 호명활동에 반드시 필요한 호칭으로 먼저 익히는 것이 우선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이름을 익숙하게 해서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 아이를 테스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잊지 말자.


한동안 이렇게 붙여 두었다가 어느 날 사진과 이름 카드 두 개를 바꾸어서 붙여둔다. 아이가 스스로 이걸 고치는지 지켜보고, 그렇지 않으면 적당한 기회에 `잘못 붙어있네`라고 하면서 바꾸는 것을 보여주고, 읽어준다. 사진과 이름/호칭을 연결 짓게 되면, 아이의 이름만 잘라서 세 글자로 만든 뒤 위에서 했던 활동처럼 순서를 섞어서 음절 단위로 익히게 해 준다. 아이 스스로 세 글자를 순서대로 조합해서 이름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자기 이름을 안다고 판단해도 좋다. 이것은 한글을 아는 것과 달리 통글자로 상징/그림을 아는 것처럼 자기 이름을 아는 단계이지만 다른 아이들 틈에서 자기 이름을 알아보고 자기 물건에 대한 인지를 하기에 충분한 단계이다.


이것은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나와 너를 알고 구별하며, 나의 것과 너의 것을 알고 구별하는 것의 시작이다. 상호작용의 시작은 나와 너의 차이를 알고 인식하며, 그 사이에서 소통을 할 필요에 따라 적절히 언어적, 비언어적 매체로 교감하여 성취를 거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것은 만지지 말라던가, 네가 직접 해야 하며 누군가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등의 단계별 고차원적 생활 습관 습득에는 당연히 필요하다.


이제 아이가 사자, 호랑이, 소방차 등의 알고 있는 단어들을 활용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간식 보상과 상관없이 진행하자(칭찬이나 미소는 언제나 대환영). 위에서는 한글로 요구 사항을 전달하는 연습에 더 비중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한글 익히기가 중점이다. 이 무렵이면, OX 활동을 하면서 어느 정도 한 자리에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해져 있을 것이다.


일단 아이가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자신 있는 단어를 서너 개 고른다. 그중에 하나를 골라서 음절 단위로 코팅된 종이를 잘라서 나란히 붙이고, 글자 순서를 섞어서 붙여둔다. 위에서 이름 익히기로 설명한 것을 이어나가 보자. 아이 이름이 김 서울이라고 전제하자.


김/서/울 이라고 붙인다.


아이가 관심을 가지면 고쳐서 붙이도록 도와주고 그와 동시에 음절을 읽어준다.


김/울/서 [김울서, 이건 틀렸네. 김 울 서]

김/서/울 [김서울, 이게 우리 서울이 이름이네. 김 서 울]


아이가 스스로 글자를 옮겨 붙여서 고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그 활동이 익숙해지게 한다.


이제 음절이 겹치는 단어들을 포함하여 1-2 단계를 해보자. 예를 들면, 새우깡과 새우칩을 가지고 연습한다거나 형제자매가 있고 이름이 돌림자라면 그 이름들을 가지고 연습할 수도 있고, 김밥이나 김치 같은 단어나 장난감, 장조림 같은 것도 좋다.


어느 정도 단어들이 모이고, 순서대로 붙이는 것을 잘하게 되면, 음절이 모자라게 붙여보자. 예를 들어, 김/밥/치 를 흩어놓고 좀 멀리 김을 하나 더 붙여둔 다음 아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본다.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 즉 이상하다 내지는 뭔가 부족하다는 듯한 생각을 하는 것 같으면, 멀리 있던 [김]을 즉시 가져와 [김/밥] 바로 아래에 [김/치]를 나란히 붙여두고 읽어준다. 즉 [김]이라는 음절이 중복이 되고, 같은 소리가 나고 여기에도 쓰이고 저기에도 쓰인다는 걸 알게 해주는 것이다. 똑같은 글자 2개가 위아래에 나란히 있는 모습을 그제야 확인하게 되는데, 가까이 두고 보니 같은 글자였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활동이 잘 되지 않으면, 아직 음소 개념이 덜 정리된 것이므로 단어를 더 많이 가르쳐서 아이가 스스로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귀납적으로 사고하며 익히고 있는 중이므로 조바심 내지 말고 아이의 속도를 존중해 준다. 아이가 스스로 단어를 만들어낸다면 더할 나위 없다.


글자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단계에서, 어느 날 같은 글자 둘 중 하나를 뗀다. 아이가 중복되는 [김]이라는 음절을 위 또는 아래로 움직여 붙여가면서 읽으려고 한다면 낱글자를 어느 정도 익혔을 뿐만 아니라 음소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도 단계가 되면, 아이가 [김]이라는 음절을 익혀서 여기저기에 보이는 [김]을 알아보는지 관찰하기 시작하자. 마트 전단지나 길거리의 간판 혹은 광고물 같은 곳에서 아이가 알아보는 것을 많이 격려해 주면 좋다. 신문의 헤드라인처럼 큰 글자들이 있는 곳에서 찾아보게 하는 것도 좋다. 우리는 사진과 글자가 함께 나와 있는 마트의 전단지를 열심히 활용했고 아이가 무척 흥미를 많이 가지고 참여해 주었다. 내가 아는 아이는 선거 시즌에만 나오는 후보 이름과 숫자 전단을 집에 붙여놓고 한글 공부의 진도에 진척을 보였을 뿐 아니라 1에서 5까지의 숫자를 떼었다고 한다. 또 어떤 아이는 공룡을 너무 좋아해서 공룡 이름으로 받침 없는 한글 대부분을 떼었다고 했다. 아이마다 좋아하는 영역이 있으니, 잘 맞춰주면 된다.


아이가 [김]이라는 글자를 익숙하게 알고 읽게 되면, [감]이라는 글자를 넣어서 [김][치][밥][감]을 붙여두자. 아이가 [감]이라는 글자를 읽으면 감동이지만, 제대로 읽지는 못하면서 [ㄱ] 발음을 하며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더욱 감동하자. 그것은 음소 [ㄱ]을 이해했다는 뜻이고 나아가 김과 감을 변별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미 혼자 더 진도를 나아간 상태일 가능성이 병존한다. 이 단계가 되면, 이런저런 음소들을 노출해서 아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보시면서 조금씩 알려줘 보자. 흥미를 갖고 좋아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음소가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으면 이제 일반 아이들처럼 한글 공부를 시작해 볼 수 있는데, 경험상 다음과 같은 점들을 기억해 두면 마음의 평화가 좀 더 유지된다.


(1) 기역 니은 디귿... 같은 발음하기도 어렵고 두 번 다시 쓸 일이 없는 이 조합은 가르치지 않는다. [ㄱ]를 [가]라고 가르치고, [ㄱ][가]부터 [ㅎ][하]까지 가르친다.


(2) [ㅏ]는 [아]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시지각이 약한 아이라면(심지어 시지각이 좋은 아이라도), [ㅏ][ㅑ][ㅓ][ㅕ] 순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너무 헷갈려서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아이 머릿속에는 태풍 매미가 휩쓸고 지나가고 토가 쏠리는 느낌에 압도된다.


수 개념을 가르치고 있거나 알고 있다면 [ㅇ]은 숫자 [0] 같아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 줘도 되는데, 그런 궁금증이나 헷갈림 따위 없이 지나가면 신경 쓰지 말자. 참고로 0은 정말 어려운 개념이므로 숫자를 가르칠 때는 0이 아닌 1부터 가르친다.


[ㅏ ][ㅓ][ ㅗ][ ㅜ][ ㅡ][ ㅣ ]


변별이 잘 되는 것부터 가르친다. 이응[ㅇ]을 넣어서 가르치되, 낱글자 가르치듯이 가르친다.


그다음은 [ㅏ,ㅑ ][ㅓ,ㅕ ][ㅗ,ㅛ][ ㅜ,ㅠ][ㅡ ,ㅣ,ㅢ ]


그다음은 [ㅔ,ㅐ,ㅒ,ㅖ]를 가르치거나 쉬운 받침을 가르친다.


가 거 고 구 그 기 와 같은 조합을 들어가는데, 위에서 가르친 순서대로 조합을 만들어서 아이에게 가르치면 된다. 이쯤 되면, 기적의 한글학습이나 기탄 한글 시리즈 같은 학습지 중에 아이 취향에 맞는 책을 사서 그 진도에 따라 가르치면 편하다. 받침이 들어갈 무렵에는 “받침 없는 동화”라는 다섯 권짜리 책이 있는데, 이걸 조금씩 읽게 해 주면 아이가 성취감을 많이 느낀다. 1학년 교과서에 일부 발췌되어 실린 책이니 믿고 읽히자.


받침까지 익히는 단계가 되면, 적당한 시점에 한글자음모음표를 벽에 붙여 놓고 읽기 연습을 시키면 좋다. 시력검사 하듯 아무 글자나 훅 가리켜서 읽을 수 있게 연습하는 것인데 놀이처럼 해야 한다. 아이가 혼자 서서 읽어보려 하면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잘 안되거나 물어보는 듯할 때에 알려주자. 틀리게 읽고 있어도 교정하지 말고, 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괜히 그 글자를 포함하여 앞 뒤 네다섯 개를 읽는 것이 낫다.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데에 2년 정도 걸렸다. 아이의 발음은 뭉개어졌지만 아이가 다르게 읽고 그것이 일관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각각의 글자와 음절, 음소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발음하기와 글자를 아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이므로, 두 개가 100%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아이가 글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발음하는 것도 가르치는 사람은 잘 알아들고 아이가 지금 아는지 모르는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므로, (우리 아이 같이 발화가 아직 안 된 )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에는 남들보다 다소간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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