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아이
영화'미나리'를 봤다. 보는 내내 그리고 끝난 후에도 이민자 가족의 새로운 터전을 보여주는 도입부의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80년대 미국의 시골 풍경 그 풋풋하고 싱그러운 경치는 마치 생명의 근원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여기에서라면 모든 것이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민자 가족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일상을 향한 친근함과 안타까움으로 변해갔다. 고통과 불행이 빈번한 평범한 우리의 삶과 그 안에서 쉴 새 없이 흔들리며 좌절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나는 그들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세워 두고선 영화가 선택한 결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얄팍한 긍정이나 무책임한 절망이 아닌 내가 납득할 만한 마무리를 보여주길 바라면서. 물론 영화는 완벽하게 나를 만족시켰다.
사춘기 아이로 힘들어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죽음이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한다. 그 단어를 마주하며 내가 떠올렸던 죽음을 생각한다.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어 습관처럼 고민했던 죽음. 그리고는 어느새 다시 묵상하게 되는 삶.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음 졸이며 했던 생각이 있다. 나는 왜 아직까지 살아있을까.
'태어난 아이'는 시크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작가 사노 요코의 그림책이다. 그녀의 명랑한 냉소와 다정한 통찰은 훔치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이다. 삶과 죽음의 신비를 그저 단순하고 담백하게 표현해내는 그녀의 방식이 마냥 좋다.
태어나고 싶지 않아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다.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으니 무서운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다.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어떤 욕망도 생겨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아이는 그저 태어나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
나에게 다시 태어나고 싶은지 묻는 사람들에게 나의 답은 늘 '아니오'였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모든 괴로움을 다시 겪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고 소름이 돋는다. 그래서 나는 그림책 속 아이가 내심 부러웠다. 내가 태어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고통 없는 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이 빌어먹을 사춘기 따위쯤은 아무 상관없이 살 수 있을 텐데.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따라온 강아지가 한 여자아이를 물었다. 여자아이가 엄마를 부르자 엄마가 달려왔다. 아프다고 우는 여자아이를 엄마가 달래준다. 그리고 막대기로 강아지를 혼내준다. 엄마는 여자아이를 깨끗이 씻기고 약을 바른 다름 반창고를 붙여 준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이 모습을 지켜본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상처받지 않은 채 안전했지만 자신이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상처 입은 아이를 안아주고 치료해주는 엄마.
아프거나 힘들 때 나는 모든 접촉을 차단한다. 방문을 닫고 혼자 누워있으면서 회복하고 기운을 차리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접촉에 대한 욕구가 현저히 떨어진 인간이라 생각했다. 혼자 있는 걸 제일 좋아하는 개인주의자라고. 그렇게 나를 정의하고 보니 나 자신에게 솔직하기가 어려워졌다. 나에게도 접촉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다만 나에게 다가오는 접촉들이 쉴 새 없는 요구로 느껴져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얘기를 하기 힘들었다. 나도 나를 안아주고 보살펴주는 접촉이 간절하다는 걸 털어놓을 수 없었다.
반창고를 붙이고 싶어서 반창고를 외치자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이가 울자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약을 바른 다음 반창고를 붙여 준다. 태어난 아이는 부드럽고 좋은 엄마 냄새를 맡으며 포근함을 느끼고 빵 냄새를 맡고 배고픔도 느낀다. 모기한테 물리면 가려워하고 바람이 불면 신나게 웃기도 한다. 다른 아이에게 자신의 반창고가 더 크다며 자랑도 한다. 밤이 되자 태어난 아이는 잠자리에 들며 엄마에게 말한다. 태어나는 건 피곤할 일이야.
반창고를 붙이고 싶어 상처를 선택하다니.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처럼 보이는데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귀찮고 상관없던 세상이 경이로운 사랑의 장소가 되었다. 상처를 무릅쓰고 태어남을 선택한 아이는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순간도 있었을 테지만 아마도 누군가의 사랑으로 피곤한 일상을 버티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림책을 보며 빨강과 초록의 대비로 이루어진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태어나지 않음과 태어남의 격렬한 투쟁처럼 보였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사춘기라는 거대한 파도에 나의 삶이 잠식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 안의 생명 에너지가 고갈되고 죽음의 기운이 드리울 때가 있다.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가 살아온 길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삶과 죽음 가운데 내가 선택해온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내가 선택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태어난 아이처럼 매일 삶을 선택하며 살아온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살게 한 사랑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이 있는 한 우리는 계속 태어남을 선택할 것이다.
중요한 건 반창고를 꼭 남에게 부탁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나에게 근사한 반창고를 붙여주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