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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미러링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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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윤 Oct 21. 2024

미러링

4화

이 면담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었어. 뭘 물어봐야 우리가 같은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을지.’

‘나도 알아. 우리가 아직 하나일 때 생각한 거니까.’

‘그럼 그때 생각해 둔 질문들이 무척 진부하고 시답잖다는 것도 알겠지.’  

‘그래.’

 ‘그러니까 전부 건너뛰고 제일 중요한 이야길 하자.’

 ‘동감이야 우리 사이에 아이스 브레이킹은 필요 없을 테니까.’


나는 잠깐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일을 떠올리는 것은 고통스럽다.


 ‘... 우리 딸이 죽었을 때, 넌 어떤 기분이 들었어?’


미러링은 생각에 잠겼다. 미러링의 코드가 동작하는 속도는 현실의 인간 능력에 맞춰져 있다. 필요하다면 연산자원을 늘려서 사고속도를 높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비용이 든다. 이곳의 미러링 휴먼들에게 가용한 연산자원은 곧 재산을 의미한다. 내 미러링은 아직 내가 선지불한 기본 연산자원만 사용가능하고 따라서 현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미러링은 꽤나 오래 침묵을 이어갔다. 오류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충격, 슬픔, 분노, 후회 같은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네가 기대하는 대답은 아닐 테니까 제쳐둘게. 그 기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그건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잖아.’


미러링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본능적인 감정반응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올라온 것은 격한 증오심이었어. 너도 알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은 그거잖아. 우리 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응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너와 나의 가장 큰 목적이야.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여러 가지였지만 우리는 가능한 모든 것을 상정한 계획을 세웠어. 하가지 고려하지 않았던 게 시간이었지. 5년은 너무 부족해. 그걸 알게 되자 그들에 대한 증오심은 더욱 격렬해졌어. 내 병까지 그들의 탓인 것처럼 느껴졌어. 5년 뒤에 내가 사라진다면 그들을 단죄할 사람은 없어. 나는 없어지고 그들은 존재해. 그걸 받아들일 수는 없어. 얄궂은 운명의 장난 따위로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일은 죽어도 용납할 수 없어.’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는 단어를 신중히 골랐고 중요한 내용은 일부러 빼놓고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가 함께 머릿속으로 준비한 대로다. 미러링 휴먼의 기억을 추출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고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이 면담은 메타버스에서 행해지는 것이니 반드시 기록으로 남게 된다.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경우 면담내용에 영장이 청구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화에 우리가 가진 모든 감정과 계획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서는 바닥모를 고통과 분노가 느껴져서 나는 안도하였다. 나의 미러링은 나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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