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제대로 산책을 하지 못했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공기가 상쾌했다. 오늘은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다. 다시 따뜻해진 날씨 때문인지 길가에 눈은 많이 녹아 있었다.
어제는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이 많이 내렸다. 몸이 무겁고 춥고 귀찮고, 한 마디로 피로가 발끝까지 쌓여 있었던 크리스마스.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엄마 눈이 오는데?"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강력한 눈빛을 그냥 모르는 척하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누워 있었다. "크리스마스인데 평소랑 똑같아." 하며 울먹이는 아이에게 미안했지만, 못 본 척 모르는 척해버렸다.
아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눈은 대부분 녹았고, 그늘진 길가에 눈오리 다섯 마리만이 눈이 내렸던 어제의 놀이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었다.
'눈이 다 녹아서 오늘은 눈싸움은 못하겠네.'
자유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 한국근대문학관이 보인다. 문학관 유리벽에 시가 바뀌어 있었다. 문학관 건물 정면 창, 일명 시창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시가 게시된다. 이번에 게시된 시는 박용철의 <눈은 내리네>이다.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눈은' 내리네, 다. 평소에는 문학관 앞을 그냥 지나처 버리는데, 하루사이에 내려 사라진 눈을 생각하니 시구가 빙글빙글 머릿속에 맴돈다.
옛날엔 눈이 내리기만 해도 좋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눈이 귀찮고 피곤한 존재로만 느껴졌다. 그래도 서서 시를 읽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내리는 눈을 보며 "눈이 너무 희고 저 눈 소리 또한 그윽"해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하"는 시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