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기 좋은 날들의 연속이다. 짧은 이 시간을 맘껏 누려야 하는데, 지금이 업무가 가장 바쁜 시기라 회의도 많고 약속도 많아 여유롭게 산책할 시간이 부족하다. 12시가 다 되어 가는데 오전까지 제출해야 할 서류를 끝내지 못했다. 대충 점심을 때우고 일을 할까 생각했지만, 과장님께 조금 늦게 제출해도 괜찮겠냐고 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하신다. 30분 정도면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우선 제대로 먹고 좀 걷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야채가 듬뿍 들어있는 건강식 포케를 든든하게 먹고 어디를 산책할까 물색하다 천천히 걷기 좋은 골목길로 향했다. 아침에는 쌀쌀했던 날씨가 따뜻하고 포근하지만, 공기는 시원함을 담고 있다. 골목길에도 산책하는 직장인들이 눈에 보인다. '그럼 그럼 이런 날씨는 산책이지.' 생각하며 길을 걷다 주택가로 들어선다. 자유공원 앞쪽으로 오래된 담이 높은 고급 주택가들이 모여 있다. 일부는 카페로도 사용되기도 하는. 주택가 나무 사이로 감이 탐스럽게 열려 있는 감나무가 보인다. 가을이 너무 천천히 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성큼 와 있었다.
탐스럽게 열려있는 감을 보고 작품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떠올랐다. 사실 제대로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다.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5.18 광주를 다룬 <소년이 온다>는 꼭 읽어야 할 소설이라 생각해 구입을 했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가 책을 덮고 말았다. 소설 속 장면들이, 사람들의 모습이 살아 움직여 내 앞으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소설 속 소년이 나에게 다시 살아나 다가오는 경험.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다 책을 덮고 말았다. 좀 내가 더 무뎌지고 단단해지면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책이다. 이렇게 한강 작가의 소설을 처음 접했던 경험 때문에 찾아 읽게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읽어야지.
높은 담장의 감나무를 모다 건너편으로 말길을 돌렸다. 두 건물 사이 약 2미터의 틈 사이 길이 있었다. 처음 보는 길이었다. 이 사이 언제 길이 있었지? 이 길을 10년 넘게 걸어왔는데 오래된 낯선 길을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서 담배 한 대 피우시며 휴식을 취하고 계신다. 골목으로 들어가다 할아버지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다시 골목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