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승리일까?
나는 버스가 오는 시간을 보지 않는다. 바쁜 출근 시간에도, 기분 좋은 퇴근시간에도 스마트 폰으로 버스 도착 예정시간을 보지 않는다. 버스정류장에서는 도착 예정시간이 눈에 보이니 남은 시간에 따라 시간을 활용한다. 버스가 도착하는 것은 선물과도 같다. 내가 버스 정류장을 가는 시간과 비슷한 타이밍에 버스가 도착하면 하루가 잘 풀린다. 버스 도착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아내에게 카톡을 보낼 수도 있고 버스 정류장 주변 하늘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 만약 버스 도착까지 10분이 넘게 남았다면? 버스 안에서 보는 신문을 정류장에서부터 평소보다 오랫동안 꼼꼼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도착시간을 알고 시간을 맞춰서 준비를 하다 보면 모든 행동이 촉박해진다. 출근을 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버스를 타기 위해 기상을 한다. 나는 아침마다 ‘오늘은 어떤 재미난 일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도착시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버스를 타러 가는 길부터 신이 난다. 아들에게 뽀뽀를 하고 문 앞에 있는 신문을 손에 들고 정류장으로 향한다. 버스가 눈앞에서 지나가도, 제시간에 와도, 늦게 오더라도 버스정류장에서 느끼는 기대는 변하지 않는다.
출근 시간보다 여유롭게 나가고 평소보다 늦게 나가도 버스는 온다. 파업을 하지 않는 이상 버스는 언젠가는 버스정류장을 지나칠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매번 시간을 들여다보며 내가 탈 버스가 몇 정거장 뒤인지 확인하느라 엘리베이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라도 많이 타는 날엔? 내리자마자 정류장까지 급하게 뛰는 것이다. 나는 버스만 기다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화가 났다. 버스 시간에 맞춰서 내 기분과 무드는 바뀌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평소 보다 10분 일찍 기상하여 준비하고 느긋하게 정류장으로 향한다. 버스 한 대를 놓치더라도, 평소보다 일찍 타더라도 내 인생은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는다.
버스를 일찍 타도 세상이 더 빨리 흘러가진 않는다. 늦게 타더라도 내 삶이 늦춰지진 않는다. 빨리 타면 빨리 타는 대로 여유가 생기고 늦게 타면 늦는 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버스를 한, 두대 놓쳤다고 해서 내 삶이 나락으로 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을 보지 않는 것으로 나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다. 덕분에 버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내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졌다.
p.s - 정신승리일까? 내 정신이 승리를 하니 기분 좋은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