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삶
길을 걷다가 네모 반듯한 상가 건물들을 본다. 길 모양에 맞춰서 각진 모양이 아닌 건물도 보이고 층수도 제각각이다. 이 건물들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고양이와 강아지를 쳐다본다. 내가 이 세상의 부속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이가 들고 오류가 생긴 걸까?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을 거부하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 또한 유전자의 산물일까?
아이가 태어나고 가문(?)을 유지하고 나서부터 의문이 눈덩이처럼 생긴다.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고 가족이 가장 소중 하긴 하지만 나의 역할과 쓰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에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라고 하지만, 나에게 종교는 통합과 통제의 기능을 하는 법률과 같은 개념이었다. 대한민국은 소중하고 내가 사는 이 땅과 국가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대해 매번 생각하진 않으니까.
인생에 대한 고마움과 현재를 살라는 마음은 나 또한 공감한다.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종교인의 삶을 사는 그들을 존중하기도 한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이해와 공감의 영역이다. 신실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로 받아들이고 풀어낼 뿐이다.
어렸을 적엔 동네친구들이 골목에 하나 둘 모이고 함께 놀았다. 약속시간이랄 게 없었다. 먼저 나오는 친구도 있고 늦게 나오는 친구도 있었다. 아버지가 오면 집에 들어가야 하는 우리 집도 있었고. 마을과 학교일만 알뿐, 다른 동네의 일들은 알지 못했다. 건너 건너 알거나 듣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으니까. 내 삶에 의문을 품거나 궁금증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나에게 세상은 골목이 전부고 학교가 전부였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세상은, 땅따먹기나 구슬치기를 하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세계 반대편의 일들을 일순간에 알게 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보니 나 자신이 더욱 초라해진다. 내가 누리고 살아내는 이 삶이, 아주 하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프리카와 북한 주민들에겐 내 삶은 이상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위를 올려다보고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삶을 산다. 나 자신이 초라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나에게 철학이 없어서일까? 의문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시우가 자전거를 타고 나는 뒤따라 간다. 아빠와 함께 노는 게 좋은 시우. 나도 피곤하지만 아들이랑 노는 게 좋다.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땀 흘리다 보면 잡생각은 사라진다. 존재의 의미? 생존의 이유? 죽음 이후의 삶? 현학적인 질문은 의미가 없다.
[아빠. 똥꼬냄새나.]
[똥냄새도 아니고 똥꼬 냄새? 엄마가 들으면 혼낸디.]
그런데 정말 똥꼬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둘째 지우가 변을 봤는데 아내가 물로만 씻은 것이었다. 아기용 바디워시가 없었단다. 나에게 고민과 의문은 똥꼬냄새에 비하면 중요치 않았다. 내가 매번 철학적인 질문을 할때면 아내가 하는 말이 있다.
[육아를 덜 했구먼.]
부정할 수 없구나.
p.s - 모든것은 인스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