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되니 아버지가 보이는구나

by 돌돌이

부모님 댁에 놀러 가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가 술기운에 한마디를 했다.


[일을 안 하니까 인생이 재미가 없다. 60까지는 재밌었는데. 사람은 딱 60살까지 살고 죽어야 해.]


아버지는 원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잘하고 장난도 잘 치는 편이지만, 갑자기 나온 60살까지란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힘들게 일하고 먹는 소주 한잔이 좋고,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그때가 그립단다. 일을 그만두고 건강도 안 좋아지고 나니 인생이 재미가 없단다. 나는 일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로또 1등을 생각하거나 불로소득이 짠 하고 나타나길 기다리곤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이가 들고 일을 하던 당신을 그리워한다.


[아버지. 아버지는 일은 안 해도 매번 같이 일하시던 친구분들이랑 매주 놀러 가시잖아요. 지난번에는 고흥 다녀왔고 이번에는 밀양 가신 다면서요. 여기서 제일 재밌게 사시는 분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세요.]


내가 한 말은 진심이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누구보다 재밌게 놀았다. 모임도 많았고 성격도 불같아서 싸움도 잦았다. 그만큼 인생에서 느끼는 만족도 또한 높았다. 비록 경제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어도 손주가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용돈을 쥐어줄 정도는 되니 크게 부족하지도 않았다. 나이를 먹어도 같이 놀러 갈 친구들이 있었고, 운전은 하지 않아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세상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닌다. 지금도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하냐고 물어보면 아버지는 막힘없이 이야기한다.


[거기는 68번 버스 타고 서면에서 갈아타야 한다. 지하철을 타도 되고.]



번화가를 나가면 차가 막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가 많다. 지하철에서 노래도 듣고 생각도 할 수 있으니까. 검색해서 찾아보면 친절하게 알려주지만 아버지에게 물어보는 게 더 좋다. 그걸 핑계 삼아 말을 건넬 수 있다. 난 아버지를 잘 모른다. 우리 두 아들들은 아빠를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배 위에 올라타는 게 일상이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엄하고 무서웠던 아버지는 손주들의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하는 것을 즐겨 듣는다. 시우가 축구학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십분 넘게 이야기를 해도 듣고 있는다. 내가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한 적이 있었을까?


두 아들덕에 나와 아버지의 관계도 더 가까워지는 거 같다. 아빠가 되니 아버지의 굽은 어깨를 볼 수 있었고 까맣게 타버린 팔도 보인다. 지금도 팔씨름은 이기지 못하지만, 우람했던 팔뚝이 사라진 아버지를 바라본다. 깊게 파인 주름이 눈에 띌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버지는 오늘도 술을 마시며 우리랑 대화를 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가 들릴 듯 말 듯 이야기한다.


[애 둘 키우기 안 힘들더냐? 그냥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은 안 들고?]


장난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그날은 아무 대답도 못했다. 가족에게 헌신한 그가 이러한 생각을 했었구나. 내가 느끼는 고민과 고통을 고스란히 겪은 그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족은 누구보다 소중하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욕망을 들킨 것 같아서 뜨끔했다.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가 사 오시던 통닭이 생각났다. 노랑 봉투에 담긴 치킨을 향해 달려들던 우리 형제들. 본인은 술이 된 채로 우리 형제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셨더랬다. 아… 아빠가 되니 아버지가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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