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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수 Nov 27. 2024

숙제

1분소설

내겐 죽음이 늘 새롭다.

주위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말이다.



엄마와 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렇게 넷.


가족 소개를 할 때, 손가락을 네 개만 펼쳐도 됐다. 그때마다 마주하는 네 손가락이 너무 예뻤다. 영원하지 못하더라도 찬찬히 휘어가길 바랐다. 그러나 죽음은 항상 서서히 가 아니라 갑자기였다.


 

손가락은 어느새 하나만 남게 됐다. 하나 펴기엔 검지만 한 게 없는데 누구에게도 삿대질할 수 없어 그것의 방향을 나에게로 틀었다. 손가락이 나를 쿡쿡 찌르지 않아도 매일 아픈 꿈을 꾼다. 그래서 꿈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달콤한 꿈을 꿀 수 있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내겐 꿈을 꾸는 시간이 죽음만큼이나 무서운데 말이다. 매일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꿈이 길어지면 두려움도 길어지니까.



차라리 먼지처럼 살다가길 바랐다.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울리지 않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필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 거다.


필은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나를 위해 드림캐처를 선물했다. 포장지를 뜯어 그것을 침대 옆에 걸어뒀다. 악몽은 여전했지만 필과의 내일을 만나기 위해 이젠 꿈을 꿔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림캐처가 바람에 날려 살랑살랑 움직인다.

악몽을 꾸는 동안 나는 그것과 싸워 이길 수 없다. 꿈을 꿀 때 그것의 힘은 너무 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았다.

깨어나면 더 이상 그것과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을.



언젠가 필의 방에서 잠들 때 이야기한 적 있다.


"나 할머니 돌아가실 때 너무 많이 울었거든. 엄마 때는 더. 근데 할아버지 때는 더 울었어. 죽음은 아물 수 없는 문젠 거 같아."


필은 어느새 흐르고 있던 내 눈물을 검지로 살포시 닦아냈다. 세상에서 가장 안온하고 날카롭지 않은 검지였다.

그날 그의 품 안에서 나는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그 후 틈만 나면 나는 그의 집으로 갔다.

잠결에 이불을 발로 차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필은 다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정 안되면 이불로 나를 돌돌 말아 자신의 다리로 고정시켰고  그 자세가 너무 갑갑하고 불편했던 나는 이후부터 이불을 차는 습관을 개선했다.



사랑은 숨 가쁜 게 아니었다. 벅차오르는 거였다.


지금도 누군가 사랑의 제스처를 묻는다면 나는 말한다.

 밤새 춥지 않게 이불을 덮어주는 거라고.





이젠 필이 내 곁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연했던 필의 검지도 볼 수 없다.


필이 죽을 때 내 마지막 손가락도 함께 접혔다.

나는 지금 펼쳐진 손가락 없이 살아가고 있는 거다.


병든 필은  내게 숙제를 남기고 갔다.

그건 내가 살아서 해야 하는 30가지의 일들이었다.

필이 죽을 때 같이 죽어버릴까 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죽게 두지 않았다.



그가 남긴 첫 번째 숙제

- 아무렇지 않기.



이젠 필이 숙제 검사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의 뜻대로 나는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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