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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사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나요?

by Defin

“당신은 어떤 사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나요?”

그즈음, 그 모임에서 커뮤니티 기획자 한 사람을 만났다. 처음엔 그냥 흥미로웠다.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사람을 엮는 구조’를 만드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브랜드는 형태가 있지만, 커뮤니티는 감정으로 움직이는 구조였다. 나는 늘 시스템과 매뉴얼을 짜던 사람이었기에, 그 세계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끌렸다. 모두가 단톡방을 열고 ‘커뮤니티’를 자처하는 시대에, 진짜 커뮤니티를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 궁금증이 나를 그에게로 이끌었다. 나는 까칠하게 말했다. “저는 A부터 Z까지 커뮤니티를 직접 만들어본 진짜 커뮤니티 기획자랑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요.” 그렇게 그와의 첫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달에 한 번, 그의 앞에서 알짱거렸다. 자주 나타나면 귀찮을까봐 일부러 간격을 뒀다. 그가 진행하는 회고 세션이 있을 때만 슬쩍 얼굴을 비췄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 앞에 서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늘 불안하고 롤러코스터처럼 들쭉날쭉한 내가 그 앞에만 서면 고요해졌다. 흔들림 없는 시몬스 매트리스 위에 눕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앞에 있는 듯했다. 그와의 시간은 내게 처음으로 ‘안식’을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살면서도 집에 가고 싶던 사람, 공간은 있어도 안식은 없던 내가 처음으로 ‘사람 안의 쉼’을 느낀 순간이었다.


회고는 언제나 조용히 시작됐다. 우리는 각자의 한 달을 돌아보고, 그 안의 감정과 선택을 이야기했다. 나는 늘 같은 질문에 막혔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나는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일까.” 그때 그는 내게 말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느냐가 더 중요해요. 직업은 껍데기일 뿐이에요. 당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설명할 수 있나요?”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입이 막혔다. 잘 보이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지금 이게 진실의 방이에요.”


그의 말은 따뜻하면서도 서늘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진짜 나’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 전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나는 늘 뭔가 아는 척, 할 줄 아는 척, 방향이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무지가 불편하지 않았다. 솔직하다는 건, 생각보다 따뜻한 일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그의 앞에서 나는 다시 내 역할을 되짚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일까.” “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일까.” 답은 매번 달랐고, 때로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질문을 붙잡고 사는 일 자체가 좋았다. 그건 방향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 나를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그 회고를 통해 조금씩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지워나갔다.


그때 나는 여전히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동시에 도망치고 싶었다. 스스로 멋져 보이고 싶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회고 시간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냥 알아요. 나는 멋진 사람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진실의 방 통과예요. 적어도 솔직하잖아요.”


그 말에 나는 웃었다. 부끄럽지만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진심이 통과하는 순간, 사람은 잠시라도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나는 한 달에 한 번, 그의 앞에서 나의 쓸모와 역할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세상이 요구하는 ‘성과’ 대신, 나를 움직이게 하는 ‘의미’를 조금씩 더듬었다. 불안은 여전했지만, 이번에는 도망이 아니라 ‘탐색’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새로운 형태의 용기였다.


그 즈음, 청두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그가 말했다. “올해 마지막은 청두에서 보내보려고해요.” 마침 나도 몽골에서 돌아오며 청두를 갈 생각이었기에 같이 가겠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선 갑자기 뜬금없는 질물을 했다. "그 요리 릴스는 왜 하는거에요? 목적을 모르겠어서." 그 무렵 나는 요리 릴스를 올리며 ‘다시 시작해야 하나’ ‘이걸 계속해야 하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음..그냥..재미요? 기록으로 시작했는데.. 요즘 콘텐츠 업로드에도 흥미를 잃었고, 방향을 잃은 느낌이긴해요." 자신없는 눈으로 물끄럼히 바라보고있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좋아요, 그냥 같이 가요. 딱히 이유는 없어도 괜찮아요.” 이유 없는 제안은 언제나 위험하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 위험이 나를 살렸다.


청두로 떠나기로 결정하고 나서 나는 한 달 동안 또다시 불안했다.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이 분주했다. ‘이건 또 도망이 아닐까?’ ‘이번엔 뭘 얻겠다고 가는 걸까?’ '돌아오면 실업급여의 마지막이 다가오는데 난 뭘해야하지?' 그러나 그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나를 평가하지 않고, 대답을 강요하지 않는 사람. 그가 있는 곳이라면, 이번 도망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한한 확신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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