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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도어 05화

도어

미안해라는 말

by Bora

무엇하러 관심을 가졌단 말인가? 타인의 어려움에 동참하며 살아온 날이 참 많았는데 허무함이 몰려온다. 혜원은 후회하고 또다시 후회를 하며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한숨을 토해낸다. 깊은 관계가 아니더라도 10명 중에 9명의 사람은 사석에서 나누었던 고민에 대하여 시간이 지난 후에 물어보면 고마워한다. 그러나 S는 달랐다. 10명의 사람 중에 9명이 아닌 1명이었던 것이다. 혜원은 생각지도 못한 돌발상황 앞에서 꽤 당혹스러웠다. 처음엔 S의 무례한 행동이 이해가 안 되었으나 혜원은 사람이란 존재는 참으로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것을 또다시 무릎을 '탁'치면서 인정하게 된다.

혜원은 S의 마음 문이 그녀에게 열려있다고 섣부른 착각을 했었나 보다. 전날 S와 통화를 했을 땐 전혀 눈치를 못 챘다. 다음 날 아침 8시 30분쯤이었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 S의 이름이 뜨는 순간, 싸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전화기 너머의 S는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밤새 그녀는 혜원과의 대화를 설익은 밥알을 꼭꼭 씹듯이 곱씹으며 속히 아침이 밝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S는 마치 독이 잔뜩 오른 독사처럼 혜원에게 일방적으로 쏘아붙였다. 그녀는 혜원의 말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었다. 혜원은 마치 덜 익은 땡감을 실수로 한입 크게 베문 것처럼 기분이 떨떠름했다. 며칠 동안 S가 괘씸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S 하고는 그 어떤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노라고 마음문을 닫아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마음속에 순두부처럼 뭉글뭉글 올라오는 울화라는 불편함은 덩어리를 만들어 내고 혜원의 마음을 짓눌렀다.


혜원은 딸과 종종 침대에 누워서 마음속에 담아 둔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침대에서 딸아이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남자친구에 대해서 듣기도 하고 혜원이 모르는 또 다른 자녀들의 비밀도 듣곤 한다. 딸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리에서 눈물이 금방 고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So Cool한 아이다. 혜원이 S와 관계가 어긋나고부터 5일쯤 지났을까. 그녀는 슬그머니 딸아이 방으로 들어갔다. 딸은 공부를 하다가 침대에 앉기도 하고 누워서 랩탑으로 한국 예능프로그램이나 외국인 여행 유튜브를 보기도 한다. 그날은 혼자서 터프하게 캠핑하는 미국 아저씨의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혜원은 딸의 침대에 은근슬쩍 누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동을 걸다가 슬그머니 마음속에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사정을 꺼냈다.

"딸, 엄마의 마음과 달리 의도치 않게 상대방이 오해하는 일이 있었어. 엄마에 설명도 안 들어보고 전화로 마구마구 화를 내는 거야. 너무 속상해. 너는 친구랑 오해가 생기면 어떻게 해?"

딸은 말없이 혜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가 싶더니 천천히 말을 꺼낸다.

"선생님 한분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어요. 운전을 하는데 도로로 어떤 사람이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내 차에 그가 치어서 죽었다면 나는, 당연히 감옥에 갈 거예요. 그러자, 어떤 친구가 선생님의 잘못도 아닌데 왜 감옥을 가야 하나요?라고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은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도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깐 엄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이 기분이 나빴거나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

"사과해도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

" 그건 상대방의 몫이에요. 엄마는 엄마의 도리를 하면 돼요."

혜원은 15살의 딸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났다. 사실은 미안하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딸아이와 대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S가 말을 걸어오면 앞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자며 차갑게 대응하려고 했었다. 더 이상 그녀와 뭔가 엮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S에게 먼저 사과를 하라니.

혜원은 딸의 조언이 머릿속으로는 동의가 되었지만 마음까지는 동조가 안되었으나 불편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혜원은 이일을 겪고 나서 그녀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새삼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녀를 아프게 했던 누군가의 행동과 말이 어쩜 악의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역해석을 해본다. 그러나 의도치 않았더라도 그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이 또한 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마음의 문이 다다르다. 어떤 이는 늘 문이 열려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반쯤, 어떤 이는 아주 조금만, 어떤 이는 아예 열려있지 않을 수도 있는데 혜원은 S에 마음의 문이 활짝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를 향해 반쯤은 열려있거니라고 추측을 했었던 것이다.


혜원은 S에게 용기를 내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상처를 주려고 했던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당신을 힘들게 했다면 미안해요."

S는 정확히 혜원이 딸과 이야기를 하기 전 단계로 그녀의 입장을 표명했다.

"저도 잘한 것은 없지만 앞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는 안 하고 싶어요."

혜원이 예상했던 대답이다. S의 감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혜원 또한 그러했었으니깐. S가 오래도록 힘들어하지 않기를 혜원은 마음속으로 빌뿐이다.


혜원은 우연찮게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훈이는 요즘 학교 생활이 어때?"

"학교 생활은 재미있는데요. 친구관계가 힘들어요."

"사실은 나도 힘든데... 너도 그렇구나. 훈이야, 나는 그럴 때마다 일기를 쓴다. 감사일기를..."

알쏭달쏭 한 눈빛으로 아이가 혜원을 올려다본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의 갈등도 점점 사그라든다. 혜원이 미안하다는 말을 S에게 꺼낼 땐 정말이지 용기가 필요했다. 아니 자존심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었다. 하지만 미안해라는 말을 혜원이 S에게 꺼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편안함에 이르지는 못했으리라. 미안해라는 말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손을 내민 사람을 향한 신의 자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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