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그리움이다
요즘 한국의 계절은 산마다 초록옷을 완연히 벗어버리고 알록달록한 색깔로 갈아입고 있는 늦가을이다. 그러고 보면 케냐에서 지내는 내내 이렇게 아름다운 고국의 강산을 잊고 산지도 참으로 오래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있었구나' 싶은 것이 갈색으로 깊어져 가는 풍경이 낯설기만 하다.
젊었었을 때는 내 아담한 손이 예쁘다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으나 한국에 정착한 지 1년 하고 8개월이 지났지만 손등 이곳저곳에 거뭇거뭇한 검버섯이며 굵어진 손가락 마디가 삶에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애틋하기만 한 나의 손 안에는 커다란 머그잔이 쥐어져 있다. 산미향이 가득 한 케냐 AA 아메리카노의 진하디 진한 검은색은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나를 유혹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케냐에서 하루에 커피를 5잔이나 마셨지만 한국에 와서부터는 횟수가 줄기는 했지만 하루에 세잔은 족히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바나나 한 개와 삶은 계란을 먹으면서 진하게 내린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음미한다.
내가 스무 해를 살았던 케냐 사람들의 피부는 검은색이다. 그 검음도 참으로 다양하지만 그곳에서 살지 않았다면 몰랐을 만큼 매혹적이다. 검은 살결 위에 물을 약간 섞어 손바닥으로 비빈 바셀린을 꼼꼼히 바르면 반짝반짝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마다 나는 그곳의 사람들의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며 비 올 때 향긋하리만큼 땅에서 올라온 흙냄새며 기름에 양파와 토마토를 튀기듯 볶은 기본양념에 케일과 근대를 넣고 볶은 '쑤꾸마' 냄새를 추억한다. 오래된 차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던 몸에 안 좋은 까만 매연조차도 그립다.
오전 11시는 나의 두 번째 커피타임이다. 집에서 우유를 듬뿍 넣어서 만든 커피를 마신다. 케냐 카페에서 마셨던 진한 카푸치노를 한국의 커피숍에서 맛볼 수가 없다. 케냐에서 사 온 원두커피를 직접 볶아서 만든 카푸치노는 거품이 풍성하지는 않지만 아쉬운 데로 밖에서 마시는 가격이 비싸고 싱거운 커피보다는 맛이 좋다. 그리고 오후 3시에는 꿀을 넣은 달달한 카푸치노 한잔을 더 마신다.
"친구야, 너는 커피를 보약처럼 마시는구나."
"생우유는 마시기 싫고 커피랑 섞어서 마시니깐 꿀맛이네."
"아직도 케냐가 그렇게 그리워?"
"그렇지,... 뭐"
내가 커피를 사랑하게 된 것은 2007년 6월, 케냐에 도착했을 때부터이다. 슈퍼마켓에서 물건 가격을 살펴보니 만만치 않았다. 볶은 원두커피도 비싸다 보니 고민 끝에 '돌만스'라는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골랐다. 뜨거운 물에 타서 마셔보니 구수한 맛과 고소한 맛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찬물에도 잘 녹아서 한국에 방문하기라도 하면 지인들을 위해서 선물로 사 오곤 했지만 아쉽게도 인스턴트커피는 자주 마시면 속이 쓰린다. 그러다 보니 케냐 사람들이 홍차에 우유를 듬뿍 넣고 마시는 것처럼 블랙커피에 우유를 넣고 마시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식빵을 곁들여 먹으면 간식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시작된 커피사랑은 매일 5잔을 마셔도 밤엔 잠을 잘 수 있었지만 한국에 오니 커피값이 밥값이랑 비슷해서 사 마실 수가 없는 거다.
나에게 커피는 케냐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다.
케냐에서 한국으로 나오기 전 3년 동안, 남편과 많은 갈등이 있었다. 케냐살이 20년이 되면 남편은 한국에서 인생 제3막을 시작하길 원했다. 우리의 은행 잔고가 늘 '0'인 데다가 나이는 50대 중반을 넘어가던 그때에 뭔가 다시 시작을 한다는 게 무척이나 고민이 되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그네들의 인생고락을 경청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봉사직에 가까운 일이었다. M선교회에서 40년 가까이 선교활동을 했지만 퇴직금이라고 받은 적은 액수는 케냐에서 선교센터를 지을 때 남편의 생명보험에서 대출받은 돈을 갚고 나니 빈손이 되고 말았다.
주택적금은 몇 해를 고작 월 20,000원씩 부었지만 보증금 한 푼이 없으니 당장 우리 부부가 살 곳이 없었다. 남편 혼자라면 연로하신 어머님 댁에서 잠시라도 지낼 수 있었겠지만 우리 부부가 함께 노모의 집에 들어가서 산다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남편은 어머님이 계신 평택 쪽에 방을 얻고 싶었지만 나는 허름한 곳이라도 서울이 좋았다. 서울에 있으면 나라는 존재가 부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들었다. 나는 당분간은 '선교사'였다는 나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많고 복잡한 도시가 차라리 좋겠다 싶었다.
나는 서울에서 살고 남편은 평택에 있다. 부부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을 위해서 나를, 너를 위한 희생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우린 선택과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각자가 원하는 곳에서 각자가 원하는 걸 하며 살자고 결정했다. 적어도 1년만이라도 그렇게 살아보자고.
나는 매일 구청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집에서 만든 카푸치노를 텀블러에 가득 채우고 백팩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제주산 귤 2개와 바나나 한 개를 넣었다. 산책하듯 30분을 걸어서 도착한 도서관에는 이미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분들이 돋보기안경을 쓰고 책과 신문을 읽고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서글픔이 아니다. 반백년을 넘게 살아온 내가, 앞으로 남은 인생이라는 길을 어떤 모습으로 걸어가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걱정보다는 궁금하기만 하다. 내 안에 다시 도전정신과 열정이 슬금슬금 일어선다.
방글아
너에 미래를 그려보았구나.
한국 생활은 어떠니? 커피를 마시면서 케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너의 모습이 짠하지만 지금 걷고 있는 길 또한 아름답다. 그것으로 충분해. 정말 수고했어.
한국에 재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그 시간을 충분히 누리길 바란다. 충분한 쉼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보일 거야. 너는 열정이 많은 사람이니 다시 무엇이든 시작할 거야. 널 응원한다. 사랑한다. 방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