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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bari Nov 27. 2022

아버지의 뒷모습

사랑이다

녹음이 짙은 무더운 여름이면

아버지는 구멍 난 러닝셔츠와

색이 바랜 바지에 흰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사십 대 중반의 아버지와 열 살의 딸은

동산에서 풀을 뜯는  보러 갔다

아버지가 먼저 오솔길 오르면

딸은 보슬보슬한 강아지 풀을 꺾어

작은 손에 한 움큼 쥐고는  따르곤 했다


87세의 아버지는 아직도 고무신을 좋아 하신다

동네가 한눈에 들어오는 동산에는

커다란 누렁 소가 말뚝에 박힌 채

풀을 되새김질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담배 꺼내 입에 물고

가슴 깊숙이 연기를 빨아 들으며

멀리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곤 했다

여름날 해지는 동산에는 

구수한 담배냄새와 풀내음이 가득 찼다


아버지는 동네에 초상이 나기라도 하면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술을 마셨다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온 날에는

영락없이 집안이 시끄러웠다

무엇이 그토록 억울한지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어

집 둘레에 있는 나무와 풀과 돌들이

수군대는 것 같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

삽자루를 어깨에 메고 논으로 가시던 아버지

땀을 흠뻑 흘리며 복숭아를 따시 아버지

적도가 지나가는  땅에서 

해지는 노을 녘을 볼 때면

그 옛날 동산에 앉아서 한참이나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이로비 북 카페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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