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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야스의 변신

케냐의 흙먼지 (14)

by Bora

케냐의 바람 속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한 흙이 섞여 있다. 마치, 한국의 2월 말에서 3월 초에 부는 칼바람은 아니지만 꽤나 비슷하다. 아침이 밝아오면 나는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 놓는다. 나이로비 시내의아파트는 창문이 한국처럼 옆으로 미는 샷시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영국 고전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창문 한 면을 밖으로 열고 닫는 식이다. 특별히 부엌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 이유는 환풍기 설치가 안되어 있어서 음식 냄새를 내보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요리를 하면서 수시로 행주로 싱크대 주위를 닦다 보면 어느 사이에 흙먼지가 부엌 구석구석에 앉아 버린 것을 볼 수 있다. 하얀색의 냉동고를 행주로 쓱싹 훔치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흙먼지가 묻어 나온다.


창문 유리가 얇고 흙먼지가 많아서 속커튼을 친다


역시나 한국에서 구매해 온 분홍색, 노란색, 연초록색의 부직포 행주가 가볍고 이물질이 잘 닦이다 보니 케냐 나의 부엌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리 오래 못 가서 낡아버린다.

보통 설거지를 하고 나면 약 40분에서 1시간 사이에 그릇을 마른행주로 닦아서 서랍장에 넣는다. 설거지 대에 그릇이 쌓여 있으면 싱크대에서 일을 할 때 불편하기 때문이다. 케냐 마트에서 산 행주로 그릇의 물기를 닦아도 수분이 남아 있어서 고민이 되곤 했다. 그나마 저녁에 설거지를 한 그릇은 밤새 자연스럽게 마르니 다음날 아침이면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기 전에 얼른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몇 해 전에 나이로비 시내 쪽에 있는 지인의 집을 방문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부엌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내가 의도치 않게 들어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를 위해서 커피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예의상 옆에 서 있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우연히 쟁반 위에 접혀있는 행주를 보게 된다. 케냐 마트에서는 볼 수 없는 천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그녀의 남편이 안 입는 러닝셔츠를 잘라서 마른행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겨드랑이 바로 밑을 가위로 뚝 자른 부분과 허리까지 내려온 부분에 꼼꼼히 손바느질이 되어 있었다. 천이 면이다 보니 물기를 닦기에는 아주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우리 집에도 아이들이 안 입는 메리야스가 남아돌았다. 아이들은 계속 성장을 하고 있는데 메리야스를 입지 않다 보니 천은 매우 멀쩡했다. 속옷을 남에게 주는 것도 찜찜해서 아이들 옷장 속에 고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집으로 오자마자 면 재질의 안 입는 메리야스를 깡그리 끌어다가 커다란 들통에 넣고 팔팔 삶았다. 삶은 메리야스와 뜨거운 물을 통째로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바싹 말린 메리야스는 잘 드는 가위로 양쪽 팔을 넣는 아래를 과감히 잘라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사각사각 잘려나가는 천의 소리가 좋기만 했다. 그리고는 지인이 바느질을 했던 것처럼 양쪽 트인 곳을 꼼꼼히 꿰맸다.


그날 이후로 우리 집 부엌에는 정체 모를 천이 나와 있다. 어느 천은 흰색에 푸른색 작은 꽃들이 그려져 있고 어느 천은 복숭아꽃처럼 전부 핑크색이고 어느 천은 아예 하얀색이다. 정말이지 메리야스의 효과는 대단히 좋다. 무엇보다도 그릇에 남아 있는 물기를 흡수하는데 최고다. 천이 면이다 보니 액체를 잘도 흡수한다. 이곳저곳에 얼룩이 생겼지만 부엌에서 만 사용하는 것이니 괜찮다 싶다.

햇살 좋은 요즘, 행주걸이 위로 살랑살랑 바람이 지나가니 사각모양의 면들이 춤을 춘다.


마른 행주가 된 메리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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