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한국의 늦가을처럼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아침부터 진하게 내린 아메리카노가 제격이다. 커넥트커피 로메오의 원두빈을 갈아서 커피를 내린다. 목구멍으로 커피 한 모금을 넘기니 두 눈이 번뜩 떠진다.
나는 워낙 찬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우리 집에는 냉장고가 없었다. 부모님께서 동네 가운데로 집을 사서 이사를 갔지만 한참 후에야 냉장고를 들여왔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래서일까 어렸을 때부터 따뜻한 음식을 선호했던 것 같다. 아무리 무더운 날에도 커피는 뜨겁게 마시고 그다음으로 꼭 뜨거운 물을 한 잔 챙겨 마신다. 누군가가 실수로 찬 물을 주거나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넣어주면 슬그머니 옆으로 밀어 놓게 된다. 혹시라도 찬 종류의 음식을 먹게 되면 냉면은 물냉면이 아닌 비빔면을 먹고 냉메밀보다는 온면을 먹고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는 거의 안 먹고 소다나 주스도 웬만해서 안 마신다. 이 증상은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고부터 더 심해졌다.
두 해 전에 한국을 방문해서 건강검진과 코로나백신을 맞았다. 그 이후로 후각이 예민해지면서 비누와 샴푸, 빨래와 주방세제, 섬유유연제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화장품 냄새까지 비위에 안 맞았고 맹물에서도 냄새가 올라왔다. 한국의 한여름에 뜨거운 물을 마시는 것이 곤욕스럽기는 했지만 냉장고에 들어간 생수를 마시다가 갑자기 속이 뒤집어지면서 몇 번이나 토하게 되었던 것이다. 약 2달간 한국에서 곤욕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케냐에 와서도 그 증상은 꽤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인가도 싶은 것이 아직까지도 차가운 음식을 먹기라도 하면 속이 울렁거린다.
지난 주말에 삼겹살을 먹었다. 멋처럼 만에 스토니라는 생강음료수를 마셔 볼까 했다. 내가 유일하게 마시는 소다였기 때문이다. 알싸하고 톡 쏘는 맛이 좋다. 냉장고에서 막 꺼내온 것이라서 차가웠지만 조금씩 마시면서 위장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한 모금, 두 모금 마실 때까지는 괜찮다 싶어서 또다시 찔금 한 모금을 마셨다. 순간, 위안이 니글니글 해져서 배추김치를 재빠르게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찬음식은 내 몸에 안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코로나 백신 접종 후에 울 집에는 텀블러가 생겨버렸다.텀블러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는데 한 개는 딸 것이지만 워낙 내가 자주 사용하다 보니 내 것처럼 되었다. 이것 말고도 서랍장에는 크고 작은 보온병이 몇 개나 더 있다. 매일 아침이면 텀블러 한 개에는 뜨거운 원두커피를 담고 다른 한 개에는 뜨거운 물에 메밀 티백을 담아서 물처럼 마신다. 아무리 뜨거운 맹물이라도 순간적으로 속이 메슥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 있을 때는 매일 텀블러를 사용하는데 외출할 때 오히려 챙겨 나가는 것을 까먹는다. 케냐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테이크아웃을 위한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하고 있지만 대부분 음식과 음료는 걸어 다니면서 먹질 않다 보니텀블러를 안 챙기게 된다. 쇼핑몰에서도 젊은 사람들 조차 음료수나 주스를 걸어 다니면서 먹는 사람은 거의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8월 말에 2학기 한글학교가 개학을 했다. 봉사하는 교사들을 위해서 사무실에 아주 특별한 커피가 준비가 되어있다. 한국에서 물 건너온 오리지널 맥심커피다. 아침을 안 먹고 학교에 가다 보니 커피를 마시면서 수업 준비를 한다. 지난 학기까지만 해도 토요일이면 텀블러를 챙겨갖고 나왔었는데 몇 번을 깜빡하고 못 챙겼다. 될 수 있는 대로 종이컵을 사용 안 하고 싶었지만 커피 애호가인 나는 이번 한 번 만이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맥심을 마신다. 그러나 학교에 일찍 오는 아이들을 맞이하다 보면 종이컵에 탄 커피를 급하게 책상 위에 놓기 일쑤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종이컵을 쳐서 손이 댈 수도 있고 엎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토요일이면 정신을 바싹 차리고 다시 텀블러를 챙긴다.
한글학교에서 사용했던 종이컵은 집으로 가지고 와서 몇 번에 걸쳐 뜨거운 커피를 따라 마셨지만 정말이지 너무 튼튼해서 거의 3주 이상을 씻어서 재활용했을 정도다.
날씨는 흐리고 해가 안 나온다. 기온까지 싸늘하니 오늘 같은 날엔 텀블러에 뜨거운 커피와 물이 자주 채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