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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bari Oct 30. 2024

아직 여행 중입니다

왜 케냐에서 사세요?라고 물으신다면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후덥지근한 저녁이었다. 밤 9시, 바람에 섞인 소나기가 한차례 도시를 훑고 지나간다. 잠시 머물다간 빗님은 푹푹 찌는 한국의 여름 날씨를 잠재울 수 없나 보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별빛하나 발견할 수 없는 도시의 밤, J는 나와의 헤어짐이 마냥 아쉬운가 보다. 그녀의 몸은 바닷가 한 곳에 머물러 있지만 보라색 꽃이 활짝  캠퍼스 교정 안에 우뚝 있던 나무를 무척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에 무겁게 매달려 있던 작은 추하나를 그녀에게 꺼내어 놓는다. 그녀는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며 조용히 말을 건넨다.  

   “지금까지 잘해 왔듯이 앞으로도 잘 해내실 거예요. 응원하겠습니다.”

  J가 8년이라는 나그네의 삶을 끝내고 고향에 정착 한지도 1년 하고도 6개월이나 지났지 것만 그녀는 케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제는 J가 쉽게 올 수 없는 그리움이 가득한 나라인 케냐에서 나는, 두발을 굳게 내딛고 살아가고 있다.      


  케냐 여행은 2007년 6월 18일, 아침 6시 18분 나이로비 조모타 공항에 도착으로 시작된다. 그전에 한 번도  와보지도 생각지도 않았던 나라에 남편과 두 아이들과 함께 도착한 것이다. 한국에서 아프리카 케냐로 오려면 가장 빠른 비행시간으로 18시간이나 걸린다.

  가족이 한 명도 없는 나라에서 어린 두 아이를 키우고 셋째를 케냐 보건소에 낳았다. 그동안의 삶을 뒤돌아 보니 정말이지 정신없이 17년이라는 시간이 후딱 지났다. 17년이라는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이유를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피상적으로 밖에 설명이 안 되는 사랑의 마음이 아니었다면 진작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케냐에서 지내면서 두 번의 안식년을 갖었다. 누구는 우리를 보면서  부럽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이 또한 깊은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다. 사실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케냐에서 유아기 때부터 자란 아이들이 훗날에 한국으로 대학을 가려면 12년 동안에 해외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런 학생들은 12년이라는 특례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한국에서 공부한 학생들보다는 수월하게 입학을 한다. 많은 부모님들은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하지 못한다. 이 또한 아이들에게 나름 부모가 줄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누구는 우리 부부에게 부모로서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충고를 했을 정도다. 그러나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죽 것 만 같은 힘듦 상황 속에서 우리가 선택한 안식년은 그때 꼭 필요했다. 이국에서 성직자로 살아가는 우리 부부가 매월 지급해야 하는 월세와 생활비와 아이들 학비는 한국보다 비싸니 외식은 감히 생각조차도 못했으니 잠시나마 안식년이라는 핑계로 케냐를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에 어린아이들은 또 다른 여행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케냐 유치원 친구들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한국엔 친구 한 명도 없는 데다가 유치원에서 하루 종일 한국말을 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어린이집을 다녀온 두 딸은 수시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언제 다시 케냐로 갈 거야?"

  어느  미술 시간엔 딸들이 사람을 그리곤 피부 색깔을 검은색으로 칠했다. 선생님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놀았던 친구들의 피부색깔이 거의 검은색이었기에 전혀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그럴 정도로 아이들은 케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른 나라가 아닌 그리움이 가득한 케냐로 되돌아오길 두 번씩이나 했다.

  가까운 가족 중에 한 분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왜 선진국인 미국이 아닌 후진국인 케냐로 간 거예요?”

   나름 설명할 이야기가 길었지만 미소를 흘리며, 나는 그녀에게 답할 것을 내 스스에게 말해본다.

  '처음에는 모험심 반으로 출발한 여행이었지만 지금껏 케냐에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사랑이라고.'


  내가 사는 곳은 나이로비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이다. 케냐는 도시 인근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아니 도시 속 소외된 지역엔 외국인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 펼쳐져있다. 빈부격차 워낙 큰 곳이기도 하고 부정부패가 심하니 사회복지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곳은 자국이 아니라 거의 외국단체인 크고 작은 NGO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부분이다.

  가 주로 만나는 현지인들은 나라 전체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입학하는 나이로비대학 학생들이다. 전기조차 없는 시골 지역에서 수업 내용을 통째로 암송할 정도로 스마트하다. 그네들과 함께한 시간이 벌써 17년이나 되었건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현지인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깊어졌다.

  나이로비대학 (메인, 교육대, 농대, 상경대) 여대생들과 한 달에 두 번, 2시간씩 미팅을 갖고 있다. 처음에 3명으로 시작했던 모임이 이제는 20명이 훌쩍 넘어간다. 젊은이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미팅에 오는 날엔 한껏 멋을 부리고 온다. 검은 피부에 바셀린을 발라서 더욱더 반짝이고 커다란 눈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대학생들의 나이는 17살부터 23살이 대부분이다. 나의 큰아이와 나이가 비슷한 학생들의 웃음소리를 듣고만 있어도 유쾌함이 선물처럼 다가온다. 웃을 때마다 하얀 이가 드러난 모습은 눈부신 햇살보다 아름다우니 진심으로 내가 사랑병에 걸려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그네들의 엄마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나지만 학생들은 엄마의 사랑을 발견하고 싶은지 언제나 나를 반긴다.


  외국인인 내가, 여대생들에게 무엇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늘 있다. 처음 한 학기에는 성경책을 읽고 서로 깨달은 점을 나누고 두 번째 학기에는 데이트와 결혼에 대한 책을 읽고 토론하고 세 번째 학기에는 프렌드 쉽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해서 짧은 강의 내용과 함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최근 미팅에서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활동은 미술이다. 어느 날은 미래에 있을 자신의 ‘웨딩마치’를 상상하고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었다. 여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쑥스러움과 진지함으로 검은색 슈트를 입은 신랑과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그리고 크레파스와 사인펜으로 색을 칠했다. 그 모습이 마냥 행복해 보이 것만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한쪽이 쓰려왔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집이나 학교에서 거의 미술 활동 없이 성장했다. 그림 솜씨가 한국 유치원생들에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그녀들이 '까르륵'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왜 중요한가 싶다.

그네들이 자주 말하는 아무 문제없어요. 하쿠나 마타타다.


 내 영어 실력은 여실히 부족하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에서 나는,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고 한글로 글을 쓰고 한국말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이 현지 대학생들과 만남을 오래도록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달란트나 돈이 많아서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지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일 것이다.

  나는 젊은 이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연민과 사랑이 싹튼다. 물론 한국에서부터 대학생들을 돕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더 깊이 케냐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이 커져간다. 간혹 양심도 없이 거짓말과 속임수를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예전처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누구의 잘잘못을 판가름하기 전에 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고 나니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여유로워졌다. 두발을 우뚝 내딛고 살아가는 케냐에서 나는, 어제보다 오늘을 더 사랑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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