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는 좋아졌지만, 실력은 제자리
남편 카드를 긁어 수채화 전용, 코튼 100% 종이를 샀다.
물감도 새로 장만했다. 완벽한 장비 세트.
전에 쓰던 종이는 물을 제대로 머금지 못해 금세 말라 얼룩이 졌다.
하지만 새로 산 종이는 달랐다. 물을 충분히 흡수하며 수채화 특유의 맑고 깊은 맛을 살려주었다.
문제는... 나였다.
종이는 완벽해졌는데, 그림은 오히려 더 엉망이었다.
지난번에 그린 게 훨씬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 순간, 오래전 엄마 아빠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빠는 입맛 까다로운 ‘맛집 지도 전문가’였다. 택시 운전을 하시며 온 동네 식당을 꿰고 있었기에 집밥에 늘 불만이 많았다.
“이 반찬은 왜 이래?”
“찌개 맛이 영 별로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서운해하며 결국 외쳤다.
“부엌이 문제야! 장비가 좋아야 음식도 맛있지!”
결국 아빠는 모아둔 비상금을 털어 대대적인 부엌 공사를 해주셨다. 반짝이는 신식 싱크대, 첨단 조리대, 뜨거운 물이 좔좔 나오는 수도까지.
어린 나도 신나서 팔짝거리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드디어 ‘결전의 날’.
엄마는 새 부엌에서 정성을 다해 찌개, 나물무침, 닭볶음탕까지 차려냈다.
아빠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한 숟갈 뜨고는 짧게 말씀하셨다.
“속았네.”
부엌이 달라졌다고 음식 맛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상관없다는 듯, 새 부엌에서 행복해하셨다.
그 기억이 떠오르며 나는 다시 내 캔버스를 바라본다. 그리고 남편의 말이 자꾸 맴돈다.
“장비 탓하는 거 아닙니다.”
아… 장비 탓도 못 하고, 그렇다고 실력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이제 어쩌나. 그냥 묵묵히 그려야지 뭐~
그래도 장비가 좋으니 그때의 엄마에 마음이 느껴진다.
기분 좋다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