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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May 31. 2024

땅이 얼었고 바다가 녹았다

바다다. 드넓은 푸른빛이 반겨주는 바다가 아니라, 빛이 하나도 없이 암흑 속에서 물이 넘실거리는 모습만 보이는 밤바다. 차마 밝은 빛을 볼 수 없는 탓에 은호는 밤바다를 선택했다.


밝은 날의 바다를 보게 된다면 어김없이 희경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엊그제 일어났던 다툼으로 잠시 연락도 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굳이 그런 수고를 더해가면서 까지 그녀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은호의 반항이었다. 바다를 참 좋아하는 그녀 탓에 자신까지 바다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탓에 다른 선택지를 고르지 못하고 김유신의 말이 되어버린 것 마냥 자연스레 향한 자신의 발걸음을 원망하며 잘라버릴 수도 없었다.


촤아아아-철퍽!


강한 바닷바람에 파도가 부딪쳐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해진다. 분명 하나도 춥지 않은 여름날의 밤인데도 은호는 자신이 마치 남극에 있는 듯한 기분이다. 꽤나 잦았던 감정다툼으로 극복하거나 상황을 넘겨내는 것에 도가 텄었던 은호는 자신이 이제는 그럴 기력이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아니,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이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동안 버리고 묻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어느새 바다 위에 대륙을 만들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고 물러서도 넘어지지도 바다에 빠져들지도 않을 만큼 넓은.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고 기껏해야 간간이 지나가는 배에서 비치는 옅은 불빛이 반사되어 들어올 뿐이다. 은호는 차갑고 강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검은 바다를 노려보고 있다. 오래 견디기 힘들 정도의 강한 바람과 눈앞에까지 튀어 오르는 듯한 파도가 몰려와도 물러서지 않는다. 바다는 더 이상 그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그는 자리를 벗어나지 전까지 눈꺼풀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바다를 주시했다.


이 넓은 땅 위에 오롯이 혼자 남아 강한 바람을 맞으며 서있다. 얼마 전의 다툼뿐만 아니라 그전에 있던 수많은 다툼들이 모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자신이 그동안 버티기만 한 것이 여기까지 흘러오게 만들었나 싶은 죄책감까지 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까지 쌓이기 전에 좀 더 진중하게 얘기를 꺼내놨더라면 멀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하지만 이미 얼어붙은 땅 위에 굳건히 서있는 자신의 모습에 다짐한다. 이번만큼은 여기 서서 희경의 온기가 닿기 전에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이러고 있는 은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경은 오르내린다. 연락을 안 한 지 오래됐음에도 아직까지 연락을 하지 않는 은호에 대한 분노가 나타나다가 그럼에도 자신이 먼저 연락하기는 죽기도 싫어서 다시 전화를 내려놓고 가만히 기다린다. 지난 싸움이 서로의 문제가 아닌 단순한 감정싸움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매번 자신을 위해 화를 풀어주고 대화를 나누어 사과를 주고받던 그가 변해버렸다는 생각에 얼어붙는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있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침착하게 자신을 챙기는 희경은 마치 북극에 있는 듯한 기분이다. 아무것도 쌓아놓지 않고 뱉기만 했던 탓에 그저 감정이란 파도가 얼어붙어 생겨버린 얼음 위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빠진다. 항상 자신까지 얼어붙기 전에 먼저 와서 따스한 온기를 건네며 구해주던 은호가 언제 올지만 오매불망 기다린다. 결코 먼저 일어서지 못한다.


그런 따스함을 느끼고 싶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대낮에 바다를 향한다. 바다에 반사되는 빛이 반짝거리며 너무 밝은 빛을 내뿜어 차마 제대로 마주할 수 조차 없다. 그럼에도 눈을 감고 가만히 순간을 느낀다.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바람에 간지러움을 느끼고 햇빛이 주는 따스함에 몸을 녹인다. 바다는 단 한순간도 보지 않고 그녀는 공상을 끝냈다.


희경은 이미 자유롭게 바다에 떠있다. 직접 마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 넓은 망망대해에 가라앉았을 것들을 들춰보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이 멋대로 만들어냈을 얼음판 위에 서있던 과거 따위는 모두 잊은 지 오래다.


분명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던 둘은 너무 멀리 극과 극에 존재한다. 희경은 다시금 자신을 녹여 떠내려왔지만 은호는 더 이상 자신을 도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본인 없이도 따스함을 즐기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더 차가운 바람을 맞이했다. 아마 그때였을 거다. 참지 못하고 한 발자국 내디딘 것이.


‘우리 헤어지자.’


결국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이 말을 보내고 다시 얼어붙었다. 은호는 그동안 자신이 온몸을 바쳐서 주었던 온기를 믿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얼어붙어 있는 사실을 안다면 그 따스한 바다를 모두 머금고 나에게 다가와 자신을 녹여줄 희경을. 자신이 쌓아온 만큼의 깊이는 아닐지라도 그에게 다가와줄 정도의 넓이는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가 차가운 바다를 마주한 체 얼어붙은 땅 위에 서있는 사이에 그녀는 이미 바다를 모두 녹여 자유롭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희경은 은호의 말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미 그에 대한 모든 것은 자신이 보지 못했던 바다에 내려놓고 떠나왔다. 거기서 행복했던 추억만을 간직하고 돌아왔다. 혼자서 아무런 빛없이 차가운 바다에서 본인의 슬픔만에 빠져있던 은호와 달리.


‘그래, 고마웠어.’


이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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