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온 '우울'

감정탐색 page.15

by 바다별다락방
우울: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음.
심리반성과 공상이 따르는 가벼운 슬픔.

표준국어대사전



우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거기에 증세를 뜻하는 '-증'이 붙으면 질병이 된다.




나는 근 10년 동안 만성우울증 환자였다. 우울증이 있으면 당사자는 자신이 우울한지 어떤지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기 어렵다. 우울증은 무기력을 업고 다니는 병이다. 사람은 누구나 슬플 수 있고, 우울할 수 있으며 때로는 무기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울이 증세가 되어버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떤 이는 그것이 의지박약의 문제라고 얘기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우울증은 벗어나보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늪과도 같다.


내 잘못이 아닌 자잘한 사건들을 처리하다가 나의 초년을 낭비했다고 생각했을 무렵, 모든 게 안정되고 나니 돌연 우울증이 찾아왔다. 너무 바쁜 나날이었기에 아픈 줄도 몰랐다. 남들은 부럽다고 느낄 안정감이 우울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안정을 찾자, 우울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루종일 누워만 있는데도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 당사자는 시간이 흐른 지도 모른다. 먹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잠이 잘 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 나의 숨을 걷어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버텨낸다.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가 덮친다. 살아남고 싶어진다. 나의 뿌리감정은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우울증 환자들이 안타까운 것은, 무언가 잘못된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돌이킬 수 없어질 때, 우울증은 찾아온다. 또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무기력을 끝없이 경험해도 우울증은 찾아올 수 있다. 정신적인 질병도 신체적 질병과 똑같은 것인데 정신질환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이 환자를 더 힘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정신분석에서는 우울증의 원인이 풀리지 않은 무의식에 있다고 얘기하고, 행동치료에서는 우울증의 원인을 긍정적 강화(긍정적인 피드백)를 받지 못해서 생긴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두 가지 학설이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하고 자란 성인은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러한 반복적인 사고패턴은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히며 급기야는 무기력을 야기한다.




나는 활동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이 나를 압도하게 되면서 표현하지 못한 분노와 울분이 쌓이고, 꾹꾹 눌러놓은 감정은 우울증세로 번지기 시작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자기 연민이 시작되었다. 자신을 어찌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일어날 수 있었던 건, '나는 언제 내편이 되어보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가 내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모든 게 좌절되고 두 손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것 같더라도, 그럼에도 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스스로가 자신의 편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우울과 같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숨만 쉬고 있었다. 숨쉬기도 버거웠다. 타고난 에너지가 많은 사람은 무기력을 견디지 못한다. 무기력한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그러나 우울과 함께 있는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우울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내면의 눌러놓은 감정의 에너지를 마음껏 우울하는 것에 쓴다. 그렇게 내버려 두니, 눈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던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배가 고팠다.




우울은 우리가 우울해도 된다는, 무기력해도 된다는 신호로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우울을 거부한다. 도망친다. 일로 도망친다. 사람으로 도망친다. 껍데기만 붙잡고 시간을 보낸다. 도망가다 보면 어느새 우울은 내 발목에서부터 시작해 몸과 마음을 온통 지배한다. 타인은 끔찍이도 돌보면서 자신은 돌보지 않는 사람이 우울증에 많이 걸린다. 이제껏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


우울은 이제 제발 자신을 돌보라는 신호이다. 무기력해도 괜찮고, 못해도 괜찮고, 슬퍼해도 괜찮고,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저 살아가라고. 그렇게 한 발짝씩 가게 되면 정말 하루하루 살아진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마음속에서 이정표도 그려준다.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했다. 우울을 극복한 지금,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가 짜릿한 행복을 주는 나날은 아니겠지만, 살다 보면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할 날이 온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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